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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리 광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397
한자 駕鶴里鑛山
영어의미역 Mine of Gahakri
이칭/별칭 가학동 광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지명/시설
지역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양윤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광산
주소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정의]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에 있던 광산.

[건립경위]

광명 지역에는 일찍이 조선시대부터 은을 채광하던 광산이 있었다. 주로 공물(貢物)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이어 대한제국 시기에도 광명 가학리에서 구리를 채광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학리 지역의 광산에서 꽤 오랜 시기에 걸쳐 채광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식민지 경제의 주요 특징인 자원 수탈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는 1917~1918년에 일본 동경의 광산업자인 이이다 노부타로[飯田延太郞]에게 가학리 광산의 채굴권을 넘겨주었다. 이후 근대적 시설을 갖춘 가학리 광산에서는 금, 은, 동 등과 같은 광물이 채굴되기 시작하였다.

[변천]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광명 지역에서 최초로 전기가 이용된 곳이 바로 가학리 광산이라고 한다. 가학리 광산에서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하여 채광이 이루어졌는데, 이때는 주로 텅스텐이 채광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600명이 넘는 광원들이 채광에 종사하였다고 하지만, 말기에는 200명이 채 안 되었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가학리 광산은 1912~1972년 은·동·아연을 채굴하다가 1972년 8·19수해 때 폐광되었으며, 이로 인해 가학리 광산을 운영하던 동방광업도 도산하게 되었다.

[현황]

가학리 광산은 폐광 이후 여러 차례 환경 문제로 물의를 빚기도 하였는데, 특히 환경 문제가 사회 문제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1990년대에 들어서 광명 지역의 광산에서 유발되는 오염으로 커다란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이를 테면 1993년 7월에는 광산 인근 지역의 구리와 아연의 농도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또한 같은 해 12월에는 아연 및 카드뮴이 인근 지역의 토양을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10년 5월 경기도가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의뢰해 실시한 ‘휴·폐광산 활용방안 연구용역’ 결과에 따르면 가학리 광산은 기존 갱도와 주변 지역을 이용한 탄광시설 체험코스 등 관광코스로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됐다. 이에 따라 가학리 광산의 활용방안도 향후 보다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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