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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395
한자 日帝强占期
영어의미역 Japanese Colonial Period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양철원

[정의]

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경기도 광명 지역의 역사.

[개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 동안 광명 지역은 시흥군 서면과 남면으로 편제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를 겪지 않으면서 현 광명시의 전신으로서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광명 지역에서도 일제의 가혹한 수탈과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 항일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3·1운동 이후 많은 청년·사회단체가 결성되어 야학 운동 등 농촌 계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행정구역의 변천]

1911년에 광명 지역은 시흥군 서면과 남면으로 편제되었는데, 이는 구름산도덕산을 중심으로 동서로 구분한 것이었다. 서면에는 일직리·소하리·하안리·철산리, 남면에는 광명리·노온사리·가학리가 속하게 되었다. 이후 1914년 다시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산·과천은 시흥군으로 통합되고, 광명 지역은 시흥군 서면과 안양의 박달리를 포함하여 남면으로 편제되었다. 그리고 면소재지가 서면 소하리에 설치되면서 면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본격적인 ‘서면 시대’가 시작되었다

[항일 운동]

일제는 식민지 수탈을 위한 작업으로 광명 지역에서도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을 실시했고, 이 때문에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영등포 등 인근 도시 지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주하지 않은 농민층은 일제의 약탈에 대해 저항 의식이 심화되었는데, 이것은 곧 1919년의 3·1운동으로 이어졌다.

3·1운동 당시 시흥 지역에서는 23차례의 항일 시위가 있었고, 광명 지역에서도 3월 27일에 노온사리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 정치를 표방하며 다소 유화적으로 식민지 지배 정책을 펴나가면서 집회·결사의 자유 등이 표면적으로나마 허용되자 청년·사회단체의 결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에 시흥군에서는 시흥청년회 등이 활동하며 야학 운동 등 농촌 계몽 운동을 전개했으며, 광명 지역에서는 서면 소하리에서 노동 야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농촌 계몽 운동도 1934년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고, 민족 해방 운동은 사회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지하화하여 전개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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