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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염씨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509
한자 坡州廉氏
영어의미역 Paju Yeom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기도 광명시
집필자 이동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세거지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집성촌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성씨시조 염형명
입향시조 염공거|염백거

[정의]

염형명을 시조로 하고 염공거·염백거를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광명시 세거성씨.

[연원]

파주염씨(坡州廉氏)는 삼한공신(三韓功臣) 염형명(廉邢明)을 시조로 하고, 공민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곡성부원군(谷城府院君) 염제신(廉悌臣)[1304~1382]을 중시조로 한다. 달리 서원염씨(瑞原廉氏)라고도 하는데, 파주의 옛 지명이 서원이기 때문이다. 문헌에는 파주 이외에 개성(開城), 광주(廣州), 양주(楊州),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하지만 모두 파주염씨에서 갈라졌다. 파주염씨는 염제신 대에 크게 부흥하였으나 아들 염흥방(廉興邦)이 이인임(李仁任)과 임견미(林堅味) 등과 정권을 전횡하다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에게 죽음을 당하면서 크게 몰락하였다. 염제신에게 염국보(廉國寶)·염정수(廉廷秀)·염흥방 세 아들이 있었는데, 광명에 세거한 염공거(廉公擧)·염백거(廉白擧) 형제는 염국보의 후손들이다.

[입향경위]

고려 말 조선 초에 염제신의 8세손인 염공거·염백거 형제가 혼란을 피해 지금의 광명시 가학동 장터말에 정착하였다. 25세손 염낙원(廉洛元)은 한국가훈연구소 회장, 안양 및 시흥군 서도회 회장을 지냈다.

[현황]

파주염씨가 처음 정착한 광명시 가학동 장터말노리실과 시흥시 논곡동 논줄 사이에 자리 잡은 곳으로 광명시에서 가장 먼저 시장이 생긴 곳이다. 처음에는 파주염씨가 이곳에서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다른 지역으로 많이 이주하였다. 시장이 섰던 곳은 현재 장밭으로 불리는데 시흥시 금이동 칠리저수지에서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로 이어지는 신작로 중간 지점이다. 예전 시흥시 금이동·무지내동·매화동 등 옛 소래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이 안양·과천 등지를 왕래하는 교통로여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다.

[관련유적]

입향조인 염공거·염백거 형제의 묘소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군용지로 징발되어 실전되었고, 현재는 후손들이 14세손 염귀일(廉貴一)의 묘부터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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