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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송윤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501
한자 茂松尹氏
영어의미역 Musong Yun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기도 광명시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세거지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집성촌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입향시기/연도 조선 전기
성씨시조 윤양비
입향시조 윤백붕

[정의]

윤양비를 시조로 하고 윤백붕을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광명시 세거성씨.

[연원]

무송윤씨(茂松尹氏)의 시조 윤양비(尹良庇)는 고려 예종 때 현리(縣吏)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보승낭장(保勝郎將)·호장동정(戸長同正)을 지냈다. 윤양비의 선계(先系)는 윤경(尹鏡)으로 후당(後唐)에서 오계(五季)의 난을 피하여 한반도로 건너와 무송(茂松)[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지방에 정착하면서 무송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후 계대가 실전되어 윤양비를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와 장령공파(掌令公派)가 있다.

윤해(尹諧)는 무송의 현리로서 문과에 급제한 뒤 내시가 되어 충렬왕을 시종하였고, 충선왕 때는 전민변정도감사(田民辨正都監使)로 임용되었다. 이후 국학대사성·문한사학을 지냈다. 문정공(文貞公) 윤택(尹澤)은 문과에 급제한 뒤 경산부사록(京山府司錄)과 교감(校勘)을 거쳐 검열이 되었다. 윤충보(尹忠輔)는 1389년(공양왕 1) 진사가 된 후 안성군사(安城郡事)를 지냈다. 조선이 개국하자 여주에 은둔하였고 태조가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나가지 않자 여거사(驪居士)라는 호를 내렸다.

윤택의 손자 윤소종(尹紹宗)은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춘추관수찬을 거쳐 중서문하성정언에 올랐다. 조선이 개국하자 병조전서에 올라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했고, 이듬해 회군공신 3등에 올랐다. 수문전학사겸동지춘추관사를 지냈으며 성리학과 경사에 밝아 문명을 떨쳤다. 문도공(文度公) 윤회(尹淮)는 1401년(태종 1)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예조정랑·이조정랑을 지냈다. 신장(申檣)과 함께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하였고 『자치통감훈의(自治通鑑訓議)』 찬집을 맡았다.

문헌공(文憲公) 윤자운(尹子雲)은 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을 지냈고, 정인지(鄭麟趾) 등과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다.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야인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무송군(茂松君)에 봉해졌다. 1470년(성종 1) 영의정이 되었고 좌리공신(左理功臣) 1등에 올랐으며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졌다. 윤옥(尹玉)은 예문관검열·동부승지·양주목사 등을 지냈고, 1561년(명종 16) 딸이 순회세자의 빈이 되어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었다.

충정공(忠靖公) 윤형(尹泂)은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호조판서·판중추부사를 지냈고, 1611년(광해군 3) 판의금부사로서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무송부원군에 봉해졌다. 윤장(尹璋)은 1592년(선조 25) 신립(申砬) 장군의 종사관으로 전투에 참가했다가 순절하였다.

단애(檀崖) 윤세복(尹世復)은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밀양 신창소학교, 대구 협성중학교 교사를 지냈다. 1909년(순종 3)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구국 운동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동창학교·백산학교·대흥학교·대종학원 등을 설립하여 교포들의 독립 정신을 고취했고, 장백(長白)에서 포수단을 조직하여 홍범도·조맹선 등과 연합 전선을 펴 일본군에 항전했다. 1923년 대종교 제3세 교주가 되었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되었다.

윤세주(尹世冑)는 3·1운동 때 만세 시위를 주도한 뒤 만주 길림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헌신하였다. 김원봉(金元鳳)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1920년 조선총독부와 주요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하여 황상규(黄尙奎) 등과 국내로 폭탄을 들여오다가 체포되어 7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화북 태백산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입향경위]

조선 전기 장령공파 10세손 윤백붕(尹百朋)이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에서 광명시 노온사동 장절리로 이주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윤백붕은 장절리에 정착한 뒤 주부(主簿) 벼슬을 지냈고, 사후에 형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윤백붕의 아들 윤화생(尹華生)은 도총도사(道摠都使)를 지냈고, 손자 윤응제(尹應濟)는 부사과(副司科)에 올랐다. 장절리에서 출생한 윤항렬은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현황]

조선 전기 윤백붕이 처음 정착한 이래 약 500여 년 동안 12대를 세거하면서 한때는 40여 호의 집성촌을 이루어 윤씨촌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1985년 11월 당시 경기도 광명시에 거주한 무송윤씨는 총 35가구에 143명, 2000년에는 55가구에 157명이었다. 매년 광명시 노온사동에서 무송윤씨 종친회를 개최하고 있다.

[수정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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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9 업데이트 연원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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