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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성구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499
한자 綾城具氏
영어의미역 Neungseong Gu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기도 광명시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세거지 경기도 광명시 철산1동 사성마을
집성촌 경기도 광명시 철산1동 사성마을 지도보기
입향시기/연도 조선 중기
성씨시조 구존유
입향시조 구흡

[정의]

구존유를 시조로 하고 구흡을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광명시 세거성씨.

[연원]

능성구씨(綾城具氏)는 구존유(具存裕)를 시조로 하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왕비 1명, 부마 3명, 부위(副尉) 1명, 정승 2명, 보국정경(輔國正卿) 10명, 등단대장(登壇大將) 10명, 문과 급제자 60명, 무과 급제자 230명, 음직 440명, 생원과 진사 150명 등을 배출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에 활동하였던 7세손들을 파조로 하여 판사파(判事派), 전서파(典書派), 시랑파(侍郞派), 좌정승파(左政丞派), 판안동파(判安東派), 도원수파(都元帥派), 재신파(宰臣派), 낭장파(郎將派), 감무파(監務派), 임천군사파(林川郡事派), 참판파(參判派), 문천군사파(文川郡事派) 등 12개 파로 분파하였다. 이 중 후손들이 이북 지역에 살고 있지만 남북 분단으로 전고(典考)를 알 수 없는 재신파, 후손이 없어 무후(无后)된 전서파와 임천군사파 등 3개 파를 제외한 9개 파 후손들이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시조 구존유는 고려시대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검교상장군(検校上將軍)을 지냈다. 구존유 이전 인물로는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918년(태조 1) 궁예(弓裔)의 태봉국(泰封國) 시중(侍中)을 지내고 고려 개국 후 나주도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台侍中)에 임명된 구진(具鎭), 후백제의 장군 구도(具道)와 구도의 아들 구단서(具端舒), 1101년(숙종 6) 탐라(耽羅)의 성주(星主) 배융부위(陪戎副尉)로 유격장군(遊撃將軍)에 임명된 구대(具代) 등이 있다.

비록 전거가 없어 능성구씨의 시조인 구존유와 이들의 관계를 알 수는 없지만 능성구씨가 당시 나주(羅州)나 능성(綾城) 지역의 토착 성씨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능성현(綾城縣) 토성(土姓) 조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능성현 토성 조에도 구씨를 능성현의 대표적인 성씨로 기록하고 있다.

각 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다음과 같다.

판사파 구인문(具人文)은 파조 구현좌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 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교리를 지냈고, 세조 때 사육신의 화를 직언하다가 보성군수에서 해임되었다. 1791년(정조 15)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판사파 구의강(具義剛)은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사헌부지평·교리·강원도 암행어사·이조좌랑·호조참판·대사성 등을 지냈다. 시랑파 구환(具桓)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병부시랑을 지냈고, 조선 개국 후에는 태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능주로 돌아가 절의를 지켰다. 시랑파 구두남(具斗南)은 1528년(중종 23)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공릉참봉(恭陵參奉)·경릉참봉(景陵參奉)을 거쳐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를 지냈다. 시랑파 구희(具憙)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 휘하에서 종사관으로 금산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에서 왜병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좌정승파 구봉령(具鳳齡)은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0년(명종 15) 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좌랑·이조참판·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저서로는 『백담집(栢潭集)』이 있다. 좌정승파 구찬록(具贊祿)은 군자감정을 지냈고, 저서로는 퇴계와의 문답서(問答書)가 전한다.

판안동파 구문신(具文信)은 1437년(세종 19) 음보(蔭補)로 내금위(內禁衛)에 들어간 뒤 국경 지역에서 적을 물리친 공을 세워 중추원사가 되었고, 이후 경상우도병마도절제사로서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겸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능원군(綾原君)에 봉해졌고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다. 판안동파 구수담(具壽聃)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검토관이 되어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유림의 서용(敍用)을 청했다가 파직되어 용천(龍川)에 유배되었고, 다시 탄핵을 받고 투옥되어 세상을 떠났다. 1567년(선조 즉위년)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도원수파 구치관(具致寬)은 1434년(세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 절제사·이조판서·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두루 지냈고, 사후에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도원수파 구인후(具仁垕)는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한 뒤 광해군 때 서전관을 지냈고, 인조반정 후 정사공신 2등으로 능천군에 봉해졌다. 이후 병조판서·공조판서·우의정 등을 지냈다. 도원수파 구완식(具完植)은 철종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수원유수·병조참판을 지냈다. 충청병사로 재임 중 충주에 피신해 있던 명성황후가 돌아올 때 호위하였고, 그 뒤 어영대장겸금위대장 등을 역임했다.

낭장파 구황(具滉)은 1588년(선조 21) 28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첨정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파하여 전공을 세운 뒤 함경도 지방을 침범한 오랑캐와 싸우던 중 전사하였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1607년(선조 40) 병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문천군사파 구영(具瑩)은 김장생의 문인으로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광해군 때 폐모후통문(廢母后通文)을 불사르고, 오랑캐가 침입했을 때 공을 세워 거의원종공신(擧義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감무파 구암(具巖)은 조선시대에 현감을 지냈고, 임천군사파 구충로(具忠老)는 지임천군사(知林川郡事)를 지냈다. 참판파 구성미(具成美)는 전라수군절제사·호조참판을 지냈다.

[입향경위]

『능성구씨대동보(綾城具氏大同譜)』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중기에 구존유의 12세손 구흡(具洽)이 경기도 양주에서 광명시 철산동[옛 시흥군 서면]으로 이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경기도 광주와 양주, 광명시에 터를 잡고 있는 능성구씨는 도원수공파 후손들이다. 구흡의 14세손 구진(具璡)은 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을 지냈고, 15세손 구인항(具仁恒)은 무과에 급제한 뒤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26세손 구인회(具仁會)는 광명시 농협조합장을 지냈고, 구정회는 초대 도의원을 지냈다.

[현황]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1985년 11월 당시 경기도 광명시에 거주한 능성구씨는 총 139가구에 590명, 2000년에는 260가구에 902명이었다. 1996년 당시 광명시 철산1동 49번지 사성마을에 집성촌을 이루어 15대째 세계를 이어 오고 있었다. 사성마을 선산에 있던 15대조 이후의 묘는 1970년 이 지역이 개발 지역에 포함되면서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에 마련된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현재 능성구씨 집성촌은 개발과 함께 사라졌고, 다만 구인회가 거주하면서 능성구씨의 옛 터를 지키고 있다. 사성마을에는 능성구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서당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유지하여 당시 제자가 20여 명쯤 되었다고 한다. 서당에 있던 많은 장서는 6·25전쟁과 1·4후퇴 때 모두 소실되었다.

이용자 의견
구**** 도원수파의 구인후장군은 조선조9버째충무공이 누락됨과그후손 구윤명은5개조판서와무언록 중수무언록 저술 능은군봉조하하사가누락되었네요,경제인으론lg회장 가정도있구요.수고하십시요. 2017.01.30
구*** 파 간에 비석 소개 가 없어서 아쉬다
  • 답변
  • 디지털 광명 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201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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