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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 신도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451
한자 姜碩期神道碑
영어의미역 Memorial Stone of Gang Seokgi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142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양철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신도비
양식 방부옥개형(方趺屋蓋形)
건립시기/일시 1940년연표보기
관련인물 민회빈 강씨|신익성
재질 오석
높이 1.54m
너비 61㎝
소재지 주소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142 지도보기
소유자 금천강씨 종친회

[정의]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있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강석기의 신도비.

[개설]

신도비는 임금이나 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아래쪽에 세운 석비를 말한다. 강석기(姜碩期)[1580~1643]는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금천(衿川)이다. 금천현 서면 노온사리[현 광명시 노온사동·학온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복이(復而), 호는 월당(月塘)·삼당(三塘)이다. 일찍이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론(禮論)을 수업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던 그해 9월에 강석기의 둘째 딸이 소현세자(昭顕世子) 빈으로 간택되어 12월에 가례(嘉礼)를 올렸다. 강석기는 병조참의,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副提學), 예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왕명에 따라 세자빈을 강화도에 피난시켰다. 강화도가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자 세자빈을 보호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나와 임금을 맞이하였다. 봄에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의 뜻을 진정하여 겨울에 재상과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를 그만두었고, 얼마 후 영부사(領府事)에 올랐다.

[건립경위]

강석기가 세상을 떠난 3년 뒤인 1646년(인조 24) 3월, 강빈옥사로 강석기의 관직이 추탈(追奪)되고, 70세의 부인 신씨(申氏)와 강문두, 강문벽 등 두 아들과 가족들이 장살(杖殺)되는 등 멸문의 지경에 이르게 되어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다가 300여 년이 지난 1940년 10세손인 강효석 등의 주도로 신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노온사동 능촌마을은 금천강씨의 세거지로 시조 강감찬의 탄생지인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와 가까운 지역이다. 구름산 서쪽에 조성된 금천강씨 선산은 15세기 인물인 강양(姜揚)부터 모셔져 있는 유서 깊은 묘역이다. 이런 연유로 강석기 신도비금천강씨 선산 입구에 세워지게 되었다.

[위치]

광명시 노온사동에서 하안동을 잇는 노안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다 노온정수장 200m 후방 오른쪽에 애기능저수지가 있다. 저수지를 끼고 영회원(永懷園) 안내판 방향을 따라 200m 가량을 가다보면 길 왼편에 강석기 신도비가 있다.

[형태]

강석기 신도비는 높이 154㎝, 폭 61㎝, 두께 30㎝이다. 방부옥개형으로 오석에 새겨져 있다.

[금석문]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관계와 예론에 밝은 경력으로 인해 강석기 신도비는 당대의 문장가인 신익성(申翊聖)이 비문을 짓고 민병승이 글을, 김용진(金容鎭)이 전자(篆字)를 썼다. 강석기 신도비는 신익성의 찬문, 금천강씨 세장기, 신도비후서로 구성되어 있다.

신익성의 찬문에는 태학사 이식(李植)이 묘지를 쓰고 제주 정홍명(鄭弘溟)이 묘표를 지었던 사실, 강석기의 가계와 관력, 광해군 대에 강화에 반대한 윤황(尹煌)을 변호한 사실을 적고 있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 왕명을 따라 세자빈을 보호하여 강화도에 피난시키고 강화도 함락 후에는 세자빈을 보호하여 남한산성으로 나와 임금을 맞이한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금천강씨 세장기에는 신도비 인근의 금천강씨 묘역 위치 및 내역을 기록하고 있다. 신도비후서에는 강빈옥사로 강씨 일족이 당한 화와 1718년(숙종 44) 빈궁의 복위로 강석기의 관작도 복권되었으나 그 후에도 성묘 등이 자유롭지 못하였던 사실과 선산 오른쪽 토지를 돌려받지 못한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강석기 신도비를 통하여 금천강씨 선산 내 묘의 소재 상황과 강석기 가계 전후 관계를 알 수 있으며 강빈옥사의 여파에 따른 중견 집안의 고초와 회복의 어려움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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