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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 은채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377
한자 光明銀採鑛
영어의미역 Gwangmyeong Silver Mini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시설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안홍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광산
주소 경기도 광명시

[정의]

조선 후기 광명 지역에서 시행된 것으로 추측되는 은광 채굴.

[개설]

조선 전기의 광산 개발은 중국에 대한 사대 조공품 및 국용(国用) 조달과 관련되어 진행되었고, 광산의 개발은 국가가 주도하였다. 그런데 지방의 수령이나 지역민들은 부담이 큰 채굴 작업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조선 초기 광산의 개발은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국과의 무역량이 점차 늘어나면서 은을 무역 대금으로 지급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은광의 채굴도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되었다. 국가에서 주도하는 채굴 이외에 민간의 불법적인 사채(私採)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국가 재정이 어려움에 처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광산 채굴이 이루어졌는데, 금천현[광명]의 은광 채굴도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금광이나 은광의 채굴은 활성화되었고, 특히 국가에서 시행한 설점수세제(設店収税制)로 민영 광업이 발전하면서 광산 개발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건립경위]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중국에 대하여 조공으로 은을 바쳤는데, 전국 각지에서 은을 채취, 수집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1411년(태종 11) 사정(司正) 정안국(鄭安國)이 국명에 따라 제련한 은 1전(銭) 4푼[分]을 바쳤는데, 당시 원래의 은석(銀石)은 금천[광명] 지역에서 채굴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이미 금천 지역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은을 채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619년(광해군 11) 4월 2일 호조에서 재정의 확보를 위하여 광해군에게 은광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면서, 은광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도성 인근의 금천 등지에 일꾼과 기술자를 모집한 뒤 채굴 시설을 갖추고, 광산의 생산 이익은 관아가 아닌 그들이 가지게끔 하며, 이를 통해 기술자를 새롭게 양성하고 그 기술자들을 각지로 보내어 은광 개발에 참여하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 건의는 광해군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6일 뒤인 그해 4월 8일에 금천의 광산을 개발하라는 전교가 내려졌다. 그러나 현재 은채광지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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