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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산동 우체부의 우편배달 가는 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C030103
지역 경기도 광명시 철산1동·철산2동·철산3동·철산4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민성혜

1965년 1월 소하리 별정 우체국에서 근무를 시작하여 1998년 12월 광명우체국에서 정년퇴임한 장기상[1941년생] 씨는 광명시 우체국 역사의 산증인이다. 당시 서면이던 광명시의 우편 업무는 시흥우체국에서 소하·일직·자경·하안·철산 지역을 담당했고, 오류우체국에서 광명·학온동 지역을 담당했다. 장기상 씨는 시흥우체국 소속으로 혼자 우편배달 업무를 시작했는데, 이후 광명 지역 우편 업무를 광명시가 담당하고 도시화가 되면서 우편배달 지역도 여러 번 바뀌게 되었다. 이 때문에 장기상 씨는 1960~1970년대 배달 지역에 대한 정확한 기억을 떠올릴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철산리 우편배달 따라가기]

시흥우체국 소속 임시 직원으로 우편배달을 할 때, 장기상 씨는 아침에 시흥으로 출근해 우편물을 받아 서면 지역으로 배달을 시작했다. 1960~1970년대만 해도 하안·철산 지역은 마찻길밖에 없어서 모든 배달은 걸어 다니면서 해야 했다. 마을을 찾아 논두렁 밭두렁을 따라 가거나, 조금 더 빨리 배달하기 위해 도덕산 능선을 따라 지름길로 배달하기도 했다.

1960년대 도덕산구름산은 민둥산이었다. 당시 장기상 씨는 겨울이 되면 눈 쌓인 산을 젊은 혈기로 넘어 다니곤 했다. 장마철 홍수가 나면 광명 지역 거의 대부분이 진창과 물바다가 되기 때문에 배달 코스가 바뀌게 된다. 시흥대교 건너 시흥으로 나가 구로공단을 거쳐 안양천 뚝방길을 따라 고척교를 건너 개봉 입구로 와서 광명리학온동 지역의 우편물을 배달했다. 낮에는 우편배달을, 밤에는 전보를 배달했는데, 전보는 급한 전갈이 대부분이라 받는 즉시 배달을 나가야 했다.

1975년쯤에는 ‘비상 훈련’이란 게 있었다. 비상이 걸리면 새벽 4~5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광명시 전역으로 달려 나가 비상을 알려야 했다. 방송도 전화도 발달하지 못했던 1970년대에 비상을 알리는 일은 우체부가 해야 할 큰 일 중의 하나였다. 1990년대로 들어서 우체부에게 오토바이가 지급됐는데, 오토바이 사고라도 나면 집배장이 대신 배달을 나가는 것이 당연했다.

시흥우체국 시절에서 서면우체국 시절과 광명우체국 시절로 변하면서 배달 업무는 점점 더 늘어났다. 또한 도시 계획에 의해 배달 지역이 수시로 바뀌고 지형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대략 철산동의 배달 지역은 소하동에서 시작해 한내를 지나 하안성당금뎅이마을[금당]과 안현, 밤일[뱀일], 안터저수지, 하안주공단지 벌말, 하안5단지 갠이불, 철산4동 달동네, 광명광덕초등학교 앞 왕승골, 민씨네 모세, 구씨네 사성, 수문이 있던 양수장마을, 뱀수다리 건너 뚝방마을, 10단지 돌산마을, 장씨네 쇠머리로 보면 된다.

현재 알려지거나 흔적이 있는 집성촌이나 자연마을 말고도 곳곳에 남아 있던 언덕을 둘러싼 몇 채의 집이 있는 동네도 있었지만, 철산동 아파트 건설로 대부분 사라졌다.

[소하동에서 하안동 갠이불까지]

시흥대교를 건너 하안동 한내를 지나 하안성당 뒤쪽이 금뎅이[금당]다. 카센터가 있는 길이 밤일로 가는 길인데, 그 도로를 따라 안터저수지도덕산 비탈을 따라 안현마을로 들어간다. 안터저수지에서 안현마을이던 실내체육관으로 들어가는 산길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실내체육관이 된 농로를 따라 하안북초중학교 지나 하안5단지, 하안1동주민센터로 나오는 길은 예전에도 마찻길이었다. 그러나 마을에 들러야 하는 우편배달길은 마찻길을 따라가지 않고 도덕산 능선을 따라 질러간다.

하안동 갠이불은 연일정씨가 많이 살았고, 가림터널로 가는 길에는 목장이 있었다. 장기상 씨는 목장에 편지를 주고 아파트 단지에 있던 마을에 들른 후 가림터널 부근의 비탈길을 따라 철산동으로 넘어갔다. 가림터널 부근엔 중생사라고 절이 하나 있었는데, 터널과 도로를 내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철산동 달동네부터 뚝방마을을 돌아 쇠머리까지]

“진주아파트 옆 산동네 67·69·70·71·74번지는 서울시에서 이주해 온 철거민들이 살도록 비탈마다 줄을 쳐서 구획해 놓은 곳이었어요. 무허가촌에는 우편함이 따로 없으니 문을 두드리거나 이름을 불러 집 안에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전달해야 했는데, 집 안에 사람이 있는데도 문을 열지 않을 경우가 많지요. 빨리 배달을 가야 하는 급한 마음에 문을 세게 두드리거나, 발로 차기도 합니다. 그러면 안에서 시비를 걸며 사람이 나오기도 하고, 언쟁을 하게 되면 막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마음이 좋지 않을 때도 많았어요. 가림터널 너머 도덕산 비탈 거의 꼭대기까지는 무허가 판자촌이 가득 있었는데, 시영아파트를 짓고 무허가촌을 헐어 그곳에 입주시켰다고 해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판자촌이 외국인에게 보이기 부끄럽다는 것이 이유라는 풍문이 있었지요.”

철산성당 뒤쪽의 장미아파트와 진주아파트 자리는 재건축 아파트 단지로 변화하였다. 시영아파트도 사라졌다.

“왕승골을 지나 모세로 가면 민씨네 마을이 ㄱ자 형태로 있고, 가운데에 바가지우물이 있었어요. 광명동초등학교 담을 따라 공군 주택이 있었고, 저 아래 교회 부근 현충탑공원[현충근린공원] 비탈에도 무허가 판자촌이 많았지요.

광복아파트 지나 양수장마을이 나오는데, 여기는 물이 많이 차오르는 곳이었는데, 많이 변했네요. 정확한 위치가 기억나지 않지만, 양수장에서 광명6동까지 수로가 있었던 기억이 나요. 뱀수다리 건너면 동양미싱이 있었는데, 철산동 사는 공장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서 구로공단으로 들어갔지요.

다리 왼편 뚝방이 철산5리인데, 공단 사람들이 집짓고 살던 판자촌이 있었고요. 동양미싱 자리는 한쪽은 철산동이고 한쪽은 구로동이라 우리 구역이 아니라도 주소를 철산동으로 썼다면 우리가 배달해야 하는 곳이었지요.”

뱀수다리에서 보도인도교가 있는 도로 근처엔 서울에서 똥을 퍼다 버리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뱀수다리에서 바라보이는 10단지 근처에 돌산이 있었다. 그 돌산마을에 들른 후 쇠머리로 가면 철산동 지역의 배달을 마치는 것이다.

장기상 씨는 “이제는 기억이 흐려지는 나이가 되어, 얼마나 자세히 서면의 우편배달 길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도, 다른 지역의 길도 옛 이야기처럼 남겨지기를 바랐다.

[정보제공]

  • •  장기상(남, 1941년생, 전 광명우체국 집배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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