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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민가 양주완씨 댁 둘러보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B020208
지역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419-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덕묵

[아방리[능말] 부잣집 양주완 댁을 가다]

아방리[능말]에 남아 있는 한옥 중 가장 규모가 큰 집이 양주완 씨 댁이다. 노온사동 419-1번지[능촌길 26호]에 자리 잡은 양주완 씨 댁은 한때 논농사를 2만 1000여 평[6만 9421.49㎡]이나 지을 만큼 아방리[능말]에서는 알아주는 부잣집이었다. 또한 슬하에 4남 4녀를 두어서 가족도 많았다.

양주완 씨 댁은 안채와 사랑채가 '「 '와 ' 」'로 서로 마주보는 ‘튼ㅁ’자 형 집이다. 이 집의 주인이었던 양주완 씨는 2007년에 아흔 살의 나이로 작고하여, 현재는 양주완 씨의 부인 김정희 씨와 셋째 아들 부자, 둘째 딸 모자가 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집을 양주완 씨 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양주완 씨가 살아 있을 당시 손수 집을 개조하는 등 집에 정성을 많이 들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인지, 작고한 지 3년이 지났음에도 문패는 여전히 양주완의 이름으로 달려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정희 씨는 부산 출신으로 줄곧 도회지에서만 살다가 중매로 시집을 왔다. 그래서 호미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고, 시골 부자가 일부자라는 것도 더더욱 몰랐다. 와서 보니 시골은 ‘내 손에 해야 돈’이 되었다. 김정희 씨는 5월 말에 시집을 왔는데, 6월 초하루에 모를 냈다. 논이 많으니 일꾼이 20명 정도 되었는데, 그 일꾼들 밥을 다섯 끼씩 지어 먹였다. 그러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오던 해 여름이 지나면서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깜깜한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다. 그래도 몸이 힘들어서 그렇지 마음은 행복했다. 남편 양주완 씨가 정말 잘 해 줬던 것이다.

[남편이 고친 집이어서 정이 더 가지]

집이 정확히 언제 지어졌는지는 김정희 씨도 잘 모르지만, 70년은 넘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희 씨가 시집와서 10년 정도 되었을 때 남편은 집을 전체적으로 뜯어 고쳤다. 양주완 씨는 건축을 따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이 집을 다 개조할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

그는 안방과 사랑방에 딸린 툇마루를 각각 터서 방을 넓혔다. 한옥은 나무기둥을 쓰기 때문에 방이 좁을 수밖에 없는데, 기둥은 그대로 두고 벽을 헐어서 방을 넓힌 것이다. 그리고 주방에 딸린 부엌광을 터서 주방도 넓혔다. ‘때는 부엌’에서 가스로 연료가 바뀌면서 더 이상 부엌광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안채와 사랑채를 잇고, 소죽광과 광이 있던 곳에 방과 부엌을 들였다. 그리고 대문 옆에 있던 외양간을 부엌으로 만들어서 방과 부엌이 딸린 독채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집 안에 부엌이 총 3개가 되었는데, 안방 부엌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를 놓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실제로 대문 옆의 방과 부엌, 사랑방 옆에 있는 방과 부엌은 세를 놓았다. 그러다가 셋째 아들이 결혼해서 소를 키우겠다고 해 대문께에 살던 사람들을 내보내고 그 방과 부엌을 내주었다. 사랑방 옆에 있는 방과 부엌도 둘째 딸이 이혼하고 돌아오자 살던 사람을 내보내고 둘째 딸에게 주었다.

[집주인의 공간 이용]

김정희 씨는 안방이 아닌, 사랑방에 거주한다. 김정희 씨가 시집와서 보니 남편은 사랑방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김정희 씨도 사랑방이 편하다. 사랑방을 좀 높이 지어서 더 시원해 보인다. 안채를 먼저 짓고 사랑채를 나중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사랑방은 원래 두 칸 방이었는데, 20년 전 집을 개조할 때 방을 트고 툇마루도 텄다. 그래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툇마루가 있던 쪽은 냉골이 된다. 툇마루가 있던 곳에 구들장을 놓지 않고 넓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15년 전에 보일러를 놓으면서 툇마루가 있던 곳에도 불이 들어온다.

아궁이 위쪽으로는 벽장이 달려 있어서 이불 등을 수납하고 있다. 김정희 씨는 벽장 쪽으로 길게 침대를 놓고 쓰고 있다. 사실 결혼 초기에는 침대가 없었다. 옛날 집이어서 방이 좁다보니 침대를 들여 놓을 공간이 없었다. 그러나 남편이 집을 고친 후부터 침대 생활을 시작했으니, 침대에서 생활한 지가 20년이 넘었다. 남편이 있을 때도 침대를 썼으나 남편이 죽기 1년 전 즈음에 기운이 없어 침대에서 내려오다 다칠까 봐 잠시 침대를 뺐다.

그 후 남편이 죽은 후 다시 침대를 쓰기 시작했다. 김정희 씨는 허리가 아파서 침대 생활을 하는 것이 편하다. 사랑방에는 100년이 넘은 장롱이 있는데, 이것은 양주완 씨의 어머니가 쓰시던 것이라고 한다. 고물장수들이 좋은 장 하나 사 줄 테니 팔라고 했지만 팔지 않았다. 안방은 제사지낼 때만 사용하고 있다. 제사 때는 식구가 많아서 잔칫집 같다. 다들 모이면 서른 명도 넘는다. 평소에는 비어 있어도 제사 때는 여럿이 모이기 때문에 안방은 세를 못 준다. 제사를 지낼 때 쓰는 병풍과 상, 유기 등은 대청마루에 보관하고 있다. 안방도 툇마루를 터서 방을 넓혔다. 툇마루를 달아내니 집이 훨씬 넓어서 좋다. 사랑방과는 달리 안방은 마루기둥을 그대로 두어서 지금도 방을 튼 흔적이 남아 있다. 부엌 아궁이 위쪽으로는 다락이 있어서 자질구레한 물건을 수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김정희 씨가 시집왔을 때 부엌과 소죽광은 ‘때는 부엌’이었다. 부엌 큰 솥에는 불을 지펴서 물을 데우고, 한쪽 솥에서는 밥을 했다. 땔감은 부엌에 딸린 부엌광[나무광]에 재였다. ‘때는 부엌’에서는 겨울이면 땔감을 마련하는 일이 큰 일거리였는데, 15년 전 즈음 보일러를 놓은 뒤로는 그런 걱정이 사라졌다. 부엌광을 터서 공간이 넓어지자 주방에 식탁을 들였다. 그리고 아궁이가 있던 곳을 높여 그 자리에 김치냉장고를 들여 놓았다.

[농가에서 주거 중심 공간으로 변하다]

양주완 씨 가옥은 예전에 벼농사를 많이 지어서 창고가 여럿 필요했다. 그러므로 집 안에 벼를 쌓아 놓을 공간인 벼광과 농기구나 연장들을 놓는 광이 따로 있었다. 20년 전 가옥의 평면도를 보면 큰사랑방 쪽에 붙어 있는 광이 각각 벼광과 농기구 등을 보관하던 광이다. 그런데 20년 전 집을 크게 고칠 때 광을 개조해서 방과 부엌으로 만들어 세를 놓았다. 그러다 보니 광이 좁으니까 집 바깥쪽 대문 오른편에다 창고를 크게 지어서 사용했다. 하지만 10년 전 즈음 양주완 씨가 죽기 전에 자식들에게 땅과 재산을 다 나눠준 후로는 농사를 거의 짓지 않게 되니 더 이상 광이 필요 없게 되었다.

마침 그 즈음 마을 주변에는 공장이 많이 들어섰고, 그 공장들에서 자재를 수납할 터를 구하였다. 그래서 김정희 씨도 신발공장을 하는 사람에게 창고를 세놓았는데, 전기 누전으로 불이 나서 창고가 타 버렸다. 결국 불을 낸 신발공장 사장이 창고를 헐고 다시 하우스로 지어 주었다.

그 일도 벌써 한 10년 가까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하우스를 세놓고 받은 임대료를 김정희 씨가 용돈으로 쓰고 있다. 아방리[능말]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이렇게 창고를 세놓아서 생활한다. 옛날에는 방이나 세를 놓을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이렇게 공장에 세를 놓기 시작하니 이제는 다들 집을 짓지 않고 창고를 지어 세를 놓고 사람 사는 방으로는 세를 놓지 않는다. 방으로 세놓으면 전기세며 수도세로 고생하지만, 창고로 세놓으면 그렇게 머리 아픈 일도 없고 간단해서 좋단다.

[정보제공]

  • •  김정희(여, 1935년생, 노온사동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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