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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산 산신님 굽어살펴 주소서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B020101
지역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능말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덕묵

구름산 기슭에 자리 잡은 산제당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아방리[능말]의 소중한 유형 유산이기에 도시화된 현대 사회의 한켠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2009년 11월 18일 오전, 필자는 부랴부랴 구름산 기슭에 있는 산제당으로 갔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며칠 전 제를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당연히 그곳에 가면 산제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산제당 주위를 둘러보아도 왠지 이곳에서 제를 지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해서 차를 돌려 마을 노인정으로 갔더니, 금년에는 영회원 앞에 있는 느티나무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다시 영회원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제를 지내고 동제에 참여한 아주머니 두 분과 아저씨 몇 분은 차에 제물을 실고 있었다. 제를 관찰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훼손되는 산제당]

주민 한 분을 옆자리에 태우고 마을회관으로 가면서 2005년부터 영회원 앞 느티나무 앞에서 산제를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연인즉, 산제당 자리에는 원래 아름다운 노송(老松)이 있어 ‘고사나무’라고 부르고 그 앞에서 제를 지냈는데, 노송이 없어지자 지금의 당(堂)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집 위에 있는 약수터를 왕래하는 누군가에 의해서 당집의 문이 파손되는 일이 잦자 2005년부터 영회원 앞 느티나무에서 제를 지낸다고 한다. 아마도 검은 손길에 의해 마구 파손되는 당집에서 부정 타지 않게 정성을 다해야 하는 산제를 지낸다는 것이 주민들에게는 내키지 않았던 것 같다. 산제당을 그렇게 만든 것은 일부 배타적 종교인의 짓으로 보이는데, 주민들도 범인은 잡지 못했다고 한다.

2001년에 조사된 『경기도 세시풍속』에 보면 6·25전쟁 때 주민 한 사람이 고사나무를 베어 팔아서 1986년 지금의 위치에 제당을 지었다고 하며, 제당 안에는 제상과 신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제당 안에 아무 것도 없는데 제상과 신위가 자주 파괴되어 설치할 수 없는 모양이다. 어떤 종교를 믿는다고 하여 다른 종교 건물이나 신앙의 대상물을 파손할 수 있을까. 그릇된 종교적 논리가 인류의 소중한 전통 문화를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수년 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세계 문화유산인 불상을 훼손하는 것을 전 세계인이 지켜보면서 그 야만성에 얼마나 격앙했던가.

옆자리에 앉은 주민에 따르면, 몇 해 전 광명시에서 산제당을 지어 주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실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구름산을 지키는 소중한 민속들을 지자체가 보다 적극성을 가지고 후원해야 할 것 같다. 광명시 대부분이 도시화된 오늘날, 이러한 자연마을의 전통들은 도시의 틈바구니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다양한 문화적 청량제이자 활력소가 되어 준다.

2010년 현재 광명시에는 마을 제당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마을 제당은 향토 문화라는 측면에서 그 가치를 알아야 하고, 향토의 문화유산으로 지자체에서 보호하고 관리해야 한다. 우선 마을 제당은 시의 유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제당에서 지내는 제의는 시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중앙의 문화재청 못지않게 지자체에서는 관내의 문화재를 보호하고 관리하며 향토문화유산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아방리[능말]의 산제]

아방리[능말]의 마을회관 앞 큰솥에서는 이미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제물로 사용한 소머리를 삶기 위해서 물을 끓이고 있었던 것이다. 동제에 참여한 사람들이 차량에서 제물을 내렸다. 미처 제물을 조사하지 못했기에 내리는 제물을 자리에 놓고 사진을 찍었다. 제물로는 소머리와 고사떡[붉은 설기], 통북어, 사과, 배, 밤, 대추, 삼색 나물, 삼색 전, 막걸리, 삶은 국수, 탕국, 청수가 올려졌다. 다른 제물들은 부엌으로 가져가고 소머리는 마당에서 손도끼로 토막을 낸 후 큰솥에 집어넣는다.

필자는 할아버지방으로 들어가 노인회장께 마을 산제에 대해 물어 보았다. 제비[제사 비용]는 어떻게 마련하느냐고 물었더니 마을 공금으로 충당한단다. 1950년 이전만 하더라도 집집마다 벼를 거두어 ‘장래돈’을 놓아 그 이자로 했다고. 아방리[능말]의 동제는 6·25전쟁을 전후로 변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예전부터 동제를 지낼 때 기록해 둔 문서들이 많았지만 언제인지는 모르나 전부 소실되었다고 한다.

제관의 경우 요즘에는 노인회장과 총무 및 노인 몇 분이 참여하여 제를 지내지만, 예전에는 마을에서 나이 든 사람 중에서 깨끗한 사람을 뽑았다. 부인이 생리 중이거나 아이들이 있는 사람은 피하다 보니 대개 나이 많은 사람이 제관으로 뽑혔단다. 지금도 9월 25일 마을회의에서 당주 한 사람과 당주를 도와줄 사람을 뽑는데, 당주로 선정되면 상가에도 가면 안 된다. 음식 장만은 당주로 선출된 사람 집에서 한다. 제를 지내기 1주일 전에 당주는 산제당 위에 있는 약수터에서 물을 길러 조라를 담가 고사나무 밑에 묻어놓고 목욕재계를 한다.

당주집에는 대문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깐다. 마을 입구에도 황토를 깔아 외부인들의 출입을 금한다. 만약 외부인이 금날에 마을에 들어오면 제를 지내기 전에는 마을을 나가지 못하게 했다. 만약 당주를 선정한 후에 마을에 부정이 끼면 해를 넘겨 다음해 정월 초이틀에 산제를 지낸다. 당주집 부인에게 월경이 있거나 그 집의 개가 새끼를 낳아도 제를 지내지 않았다. 마을에 상을 당하거나 출생하는 아이가 있어도 제를 지낼 수 없었다. 과거에는 이렇게 금기가 무서웠다. 요즘에도 마을에 부정이 있으면 해를 넘겨서 다음해에 제를 지낸다.

제를 지낼 때는 당주와 축관 및 제관 몇 명이 제당으로 간다. 제관들은 진설을 하고 제복을 입는다. 먼저 강신주를 올리고 초헌을 한 후 재배를 하고 축문을 읽는다. 다시 아헌을 하고 재배를 한 후 종헌을 하고 재배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산제가 끝나면 신위와 축문을 소지한다. 또한 북어와 떡 조각, 밤, 대추, 소고기를 조금 떼어서 나무에 묶어 둔다. 생활이 어려운 시절에는 이것을 먹기 위해 사람들이 새벽같이 올라가서 가져다 먹었다고 한다. 제물은 음복을 하고 집집마다 나누어 준다.

제일은 매년 음력 10월 2일인데, 원래 자정에 지내다가 10여 년 전에는 저녁 9시에서 10시경에 지냈으나 요즘에는 오전 10시경에 지낸다. 10여 년 전에는 제일 저녁에 당주집에서 떡을 쪄서 등불을 들고 제당에 올라가 제를 지내고 당주집에 내려와 음복을 했다. 산제를 지내는 동안 각 가정에서는 그 시간에 ‘가을고사’를 지냈다.

노인회장님과 인터뷰를 다 할 무렵 음식상이 들어왔다. 소머리 삶은 고기와 제상에 올렸던 나물, 떡, 전 등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리와 같이 먹어요.” 하고 어르신들이 필자에게 음식을 권했다. 어느 곳을 가나 나누어 먹는 인심이 풍부한 우리네 인정, 소중한 미풍양속이다. 이날은 마치 동네잔치라도 벌어진 것 같았다. 할아버지방이나 할머니방에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은 구름산 산신께 정성을 다해 제를 올리고 그 복된 음식으로 음복을 하고 마을의 안녕을 빌며 또 1년을 보내는 것이다.

“산신님, 굽어살펴 주소서!” 하고.

아방리 [능말] 동제의 특징이라고 하면, 예부터 노인들이 제를 주관한다는 것이다. 보통 마을에 따라 깨끗한 사람으로 제관을 선정하되 반드시 노인으로 구성되지는 않는데, 광명 지역의 동제에서는 노인들이 주관하는 경우가 많다. 제관은 부정이 없고 부인도 달거리를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노인들이 제관으로 선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방리[능말]에서는 줄다리기 줄을 메고 마을을 도는 사람들도 노인으로 구성된다. 연장자를 우대하는 마을의 전통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러한 행사에서 노인의 역할이 강한 것이 아방리[능말]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제공]

  • •  양주옥(남, 1931년생, 노온사동 주민, 능말 노인회장)
  • •  양승옥(남, 1955년생, 노온사동 주민, 애기능저수지 관리인·아방리 민속보존회 회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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