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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월리에서 살으리랏다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A030201
한자 雪月里-
지역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설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학

설월리는 1970년대까지 150여 호가 모여 살던 면소재지로서 광명 일대에서 가장 전통 있고 번성했던 마을이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고 전국이 개발로 몸살을 앓기 전까지 설월리 주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했다.

다음에 소개하는 세 분은 설월리에서 태어나서 현재까지 설월리를 떠나지 않고 평생을 살아온 분들이다. 이들은 살아 온 방식들은 서로 다르지만 지금 이 시간까지도 설월리의 공동 이익을 위해 애쓰며 설월리에 애정을 갖고 사시는 분들이다.

[평생을 농민으로 살다]

1932년 일제강점기에 설월리에서 태어난 김정관[1932년생] 씨는 평생 동안 설월리에서 전형적인 농부의 삶을 살았다. 해방과 6·25전쟁, 근대화를 거치면서 김정관 씨가 겪었던 일은 이곳 설월리가 겪었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한다.

“4남 2녀 중 장남으로 설월리에서 출생했습니다. 영당말에 있던 서당에 들어가서 천자문을 떼고 열 살 때인가 서면보통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때 국민학교는 시험 봐서 들어갔어요. 당시 서면보통학교에는 한 학년당 한 학급씩이었는데 학급당 학생 수는 57~58명이었습니다.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고 창씨명은 가네다 데이깡이었죠. 4학년 때에 해방을 맞아 해방 뒤에는 한글만 배웠습니다.

졸업한 이후에는 중학교 진학 포기하고 죽 농사일에 종사했어요. 학교 가는 친구를 보면 부럽고, 공부하고 싶어 환장하는 거였어요. 내가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아버지가 영 못 가게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겠어요?

아버지가 물려주신 뚝방 먼 데에 한 430평[1421.49㎡] 밭을 일구었습니다. 1940년대 후반 당시의 설월리는 부촌이어서 많이 짓는 사람은 논 60마지기, 밭 몇 천 평씩을 가지고 있었던 때였거든요. 가정 형편이 어려웠으니 농사지으면서 안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6·25전쟁 후 스물네 살 때 사모관대 쓰고 구식으로 결혼했어요. 가정을 꾸린 후 열심히 농사짓고 살았습니다. 파, 무, 배추 등 많은 것을 심었어요. 신작로 옛날 우체국 자리에 서울 사람이 포도나무 심은 게 있었는데, 약 1200평[3966.94㎡] 정도 빌려서 27년 동안 포도 농사를 지었어요.”

김정관 씨는 연년생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힘들었다고 토로하였다.

“애들은 연년생으로 줄줄이 낳아 놓고 가방은 들려서 학교 보내는데 도저히 가르칠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별 짓 다했어요. 초식[채소 농사]도 해 보고 포도나무 농사도 오래했어요. 포도 농사 수입은 괜찮았습니다. 밑창[포도나무 아래쪽]에다 딸기를 심으면 집사람이 따서 팔아 가지고 애들 학비, 교통비 등에 보탰어요. 딸기가 봄 첫 과일이니까 많이들 사러 왔죠. 하우스 농사가 아니고 포도나무 밑에 봄에 잎사귀가 없을 때 딸기를 심었습니다. 원두막처럼 가판을 놓고 그렇게 판매한 것은 아니고 사러 오면 따 주고 그랬어요. 그 딸기를 가을엔 짚으로 덮었다가 다시 봄에 걷어 가지고 썰어서 깔았어요.”

1940년대 후반만 해도 설월리서면의 소재지였기에 면사무소와 동사무소도 있고 학교도 있어서 사람들의 출입이 잦은 지역이었다. 마을 호수도 약 백 세대나 될 정도로 컸고, 동네에 우마차가 30대나 있을 정도로 웬만한 집은 대농가였다. 밭도 몇 천 평씩 갖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인심이 좋은 동네였다고 한다. 김정관 씨는 소작이긴 하지만 논농사도 4000평[1만 3223.14㎡] 정도 경작했다고 한다. 농사를 소홀히 하면 삼형제를 공부시킬 수 없었기에 젊었을 때는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일만 했다. 당시 김정관 씨는 우마차를 끌고 서울로 똥 실으러 엄청 많이 다녔다고 했다.

“영등포고 뭐고 안 댕긴 데가 없어요. 그게 거름이니까. 가을이면 동네가 엄청 활기찼었죠. …… [중략] 지금은 농사짓지 않아요. 애들은 삼형제 모두 광명 근처에서 살고 있습니다. 전에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살고 있어요. 김장을 해 놓고 애들이 찾아오면 나눠 주곤 한답니다. 애들의 도움을 원하지 않아요. 애들이 장가들고 열심히 일해서 잘살기를 빌 뿐입니다.”

[설월리의 변화를 기록한 산 증인]

1939년생인 최문락 씨 역시 평생을 설월리에서 살고 있는 토박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 있던 중학교를 졸업하고 운수업을 했지만 설월리는 떠나지 않았다.

설월리에 대한 그의 애향심은 사진 촬영으로 이어졌다. 그가 카메라에 담은 설월리의 모습은 자신이 살았던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의 회고담을 들어 보자.

설월리에서 출생해 서면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남영동에 있는 조양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시흥까지 걸어가서 천안에서 금촌까지 가는 통근 기차가 있어요. 그걸 타고 학교에 다녔어요. 연착할 때는 2~3시간씩 늦는 경우도 많았죠. 연착했다는 고무인을 팔뚝에 받고 학교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 시절 대부분의 농촌 학생들이 그랬듯이 방과 후에는 집에 와서 꼴 베어 오는 등 가사를 많이 도와야 했어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군에 입대, 3년을 복무하고 제대한 뒤에도 집안 농사를 많이 도왔습니다. 그 때 인분을 나르는 똥탱크를 우마차에 싣고 인분 구하러 새벽에 구로동에 많이도 다녔어요.”

최문락 씨가 운수업을 시작한 건 결혼을 하고 서른 살이 넘어서였다. 처음에는 삼륜차로 영업을 하다가 소형 버스를 구입했다. 그 후 삼영운수에 소속되어 1980년대 말까지 운수 사업에 종사했다고.

최문락 씨는 지금도 설월리의 순간순간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사진에 취미를 붙이고 여러 곳을 다니며 촬영을 해 보았습니다. 특히 설월리 마을의 이모저모를 촬영해서 많은 자료 사진들을 갖고 있습니다. 필요한 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을 큰 보람으로 여깁니다.”

설월리를 카메라에 담는 건 고향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그래서도 그는 지금도 설월리의 현안을 해결하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새마을 지도자의 길을 걸은 젊은 날]

1944년생인 최호진 씨는 지도자의 삶을 살았다. 지도자라고 해서 누구를 부리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었고 설월리를 위해 봉사하고 일하는 지도자였다. 자신이 나선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 종용해 세운 자리에서 그는 묵묵히 일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설월리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려서 부친이 사망한 뒤에 어렵게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어머니는 29세에 5남매를 둔 과부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외가가 학온동인데, 어머니가 맏딸이고 외삼촌 세 명과 집안 아저씨들이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장남으로 가사를 열심히 도왔고 청년 시절에는 4H활동에도 참여했어요.

1960년대는 동네 경로당이 동네 여러 가지를 결정하던 곳이었어요. 혹 청년들이 불량스런 행동이라도 하면 불려 가서 혼나기도 하던 곳이죠. 1970년 어느 날 경로당의 부름을 받고 출석해서 설월리 새마을 지도자를 권유받고 바로 임명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새마을 운동에 나서게 되었죠.

장화 없이는 못 살던 시절에 새마을 지도자를 맡아, 마침 오리동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고 남은 시멘트와 설월리 보유분을 합친 300포대 시멘트를 갖고 큰 도로에서 면사무소를 지나 현 설월길 위쪽[참샘물약수터 높이] 길까지 처음으로 시멘트 포장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당시만 해도 마을 일이라면 주민 너나할 것 없이 함께 도왔던 시절이었죠.”

그러다가 최호진 씨는 1973년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에 입사했다.

20여 년 열심히 일한 덕분에 진급도 빨리 돼서 부서장 위치까지 올랐다. 1991년 지방 선거가 행해졌을 때, 주변에서 나가 보라고 권유했지만 준비가 되지 않아 출마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마음이 준비를 한 뒤, 설월리 원로회의에서 박수로 후원을 받으며 1995년에 출마해서 광명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그 후 내리 3선에 성공해서 결국 광명시의회 의장에 선임될 수 있었다.

“가난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설월리를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열심히 살아 왔어요. 그린벨트에 묶여 낙후된 설월리 마을이 발전할 수 있도록 주민들의 힘을 모아 노력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설월리의 발전을 꿈꾸며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최호진 씨의 말에서 설월리의 밝은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정보제공]

  • •  김정관(남, 1932년생, 소하2동 설월리 주민)
  • •  최문락(남, 1939년생, 소하2동 설월리 주민, 동정자문위원장)
  • •  최호진(남, 1944년생, 소하2동 설월리 주민, 전 광명시의회 의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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