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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6·25전쟁의 기억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A020202
지역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설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학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겪었던 사람이라면 이 날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설월리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기억은 피난민으로, 의용군으로 겪었던 생생한 전쟁의 두려움과 긴장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전쟁 통에서 지켜 낸 자식과 가족, 국가가 있었다.

[병아리 같은 5남매 품고 마을에 남다]

당시 30세였던 설순금[1921년생] 씨의 전쟁에 대한 기억은 아련하다. “우리 집은 폭격당하지 않았어. 피난민이 외양간까지 차고 넘쳐서. 멍석 둘러치고 깔고 살았지. 주변의 집들은 많이 탔는데도 나는 피난 못 갔어. 애 다섯 데리고 피난갈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장만해 놓은 곡식들을 여러 그릇에 남겨 놓았는데 그거 아까워서 잃어버릴까 봐 피난 떠날 수가 없었지.

때마침 아이들이 마마에 걸렸어. 별수가 없어 그저 기도만 들였지 정한수 떠놓고. 마마님 ‘굽어보시고 살려 주세요’ 하고 빌었어. 마마님이 싹싹하시니 그저 공을 들여야 돼. 김치도 썰지 못해, 칼 대면 안 돼. 김치도 그냥 찢어 먹었어.”

설순금 씨는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그 시절에 5남매 중 한 명의 자녀도 잃지 않고 모두 훌륭하게 키워냈다. 하늘의 운도 따랐겠지만 한 아이도 포기할 수 없어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피난을 마다하고 5남매를 모두 품은 그녀의 어깨 위로 총탄이 피해 갔기 때문은 아닐까? 설순금 씨는 큰딸이 벌써 일흔 살을 지났다며 웃었다.

[전쟁처럼 무서운 게 없지]

이양호[1924년생] 씨가 전쟁을 맞은 것은 스물여덟 살의 건장한 청년 때였다.

“1924년 갑자생으로 1939년 열여섯 살부터 철도국에 근무하다가 스무 살인 1945년에 징병 통보를 받았어요.

스물한 살에 중국 계림에서 군 생활 중 장개석군의 중앙군과 교전하다가 해방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집으로 돌아와 혼례를 치른 뒤 6·25전쟁을 맞게 되었지요.

중공군이 개입한 후 1·4후퇴 이후 마차에 짐을 실어 부모님과 동생, 부인, 두 딸 등 가족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이어서 대구로 피난을 했습니다. 이때 피난민이 많아 집에서 일직리까지 하루가 걸렸으며 식구들은 남양까지 가는데 사흘이 걸렸다고 합디다. 수원까지 가서 대구행 막차를 기다리다가 장인어른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장인어른이 군에 투입하기 위한 제2국민병[보충병]의 도민증을 발급하기 위해서 등사기를 밀고 있어 그것을 도왔어요. 집에 돌아온 것은 두 달 후로 간신히 가족들과 연락이 닿아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집을 중공군이 야전 병원으로 사용했는데 집 주위로는 아직도 벽에 핏자국과 함께 사람 시체가 있었어요.”

당시 열아홉 살 청년이었던 김정관[1932년생] 씨는 의용군을 탈주해 대한청년단에 들어가 제2국민병을 거쳐 국군에 입대하기까지, 그야말로 싸우고 지키는 삶을 살았다고 했다.

구름산 저기 능 있는데. 그 위 큰 바위들이 있어요. 거기 굴이 있고. 기어들어가서 물 떠서 먹고 그랬어요. 인민군들이 거기까지 올라오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통 여기 농사들이 많으니까 들로 많이 가서 살았어요. 참외밭. 서울 사람들이 여기 시흥 참외 알아 줬어요. 그래서 참외 밭들이 많고 원두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들에 가서 많이 살았어요. 여기 수복하기 전에 내려왔어요.”

그러다가 김정관 씨는 결국 의용군으로 뽑혀서 수원까지 갔다고 한다.

“그때 수원 어느 대학까지 갔다가 그날 저녁으로 내튀었지요. 거기서 끌려가면 죽는 거니까 도망쳤어요. 대농가의 일꾼들, 모심던 사람들은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살아 온 사람이 별로 없이 다 죽었어요. 가서 많이들 도망쳤거나 죽어서, 그러니까 의용군 가서 다녀온 사람은 별로 없어요.”

다시 마을로 돌아온 김정관 씨는 대한청년단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았다.

“동네에서 훈련을 시켰는데, 나무로 총 만들어 총 가지고 훈련받았습니다. 주로 시흥에 가서 받았어요. 시흥초등학교 있는 데서. 가족들은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 데리고 피난 나가셨어요. 1·4후퇴 때, 저 아래 시골까지 갔다가 거기서 해산하여 각자 걸어서 얻어먹으면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1951년 1·4후퇴 때는 제2국민병으로 경상남도 함안까지 갔다가 귀향하였습니다. 올라오다가 김천서 설월리향토방위대에 머무르다가 귀향하였어요. 그 후 1952년 12월 12일 국군에 입대, 논산훈련소 입소 후 통신학교에서 교육받는 도중에 휴전이 성립되었어요. 총 6개월 근무한 뒤 의병 제대하여 주로 농사에 종사하였습니다.”

당시 열두 살 소년이었던 최문락[1939년생] 씨 역시 비처럼 쏟아지던 미군의 폭격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정보제공]

  • •  설순금(여, 1921년생, 소하2동 설월리 주민)
  • •  이양호(남, 1924년생, 소하2동 설월리 주민)
  • •  김정관(남, 1932년생, 소하2동 설월리 주민)
  • •  최문락(남, 1939년생, 소하2동 설월리 주민, 동정자문위원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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