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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통 배움의 터 서면초등학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A020104
한자 -年傳統-西面初等學校
지역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설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학

광명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면초등학교의 연원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으로 올라간다.

1908년 오리 이원익의 후손 이연철(李淵哲)이 사재를 털어서 서면 소하리 883번지[현 소하리 883-13번지]의 현 광명감리교회 자리에 세운 운양의숙이 서면초등학교의 모태이다.

당시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후 1910년까지 일제가 조선의 식민지화를 추진하면서 대한제국의 교육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 운양의숙은 경기도와 시흥 지역의 초등 교육 기관으로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초등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운양의숙 신축은 당시 사회적으로도 크게 주목을 받았다. 융희 2년인 1908년 6월 3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운양의숙(雲陽義塾) 교사 신축 낙성식이 성황을 이루었다’는 기사를 보면 운양의숙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시흥군 소하리에 거주하고 있는 이연철 씨가 동네에 운양의숙을 설립하고 교사(校舍)를 신축하여 낙성식을 거행하였는데 원근동에서 신사 유지를 위시하여 학부모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전 11시에 개회하여 의숙 설립과 교사 신축에 대한 취지와 경과를 설명한 데 이어 내빈들이 축사와 권학(勸學)에 대한 격려가 있었다. 다과회를 하고 폐회하였는데 참석한 인사와 주민들이 이연철 씨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초등 교육 기관으로 자리 잡다]

3년 후인 1911년 11월 시흥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자 운양의숙은 시흥공립보통학교 분교장으로 지정돼 그 해 9월 4일 개교식을 하였다. 1학년과 2학년을 수료한 아동을 시흥공립보통학교의 3학년으로 편입해 진학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 후 1925년 운양의숙이 개교된 지 20년이 되어 교사가 낡고 신축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대두되자 소하리 904번지에 연와조의 신축 교사를 지었는데, 이때 교사 건립을 위해 이연철은 서면의 주민들과 더불어 물심양면으로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교사 신축에는 1만 수천 엔(円)의 거금이 들었으나 당시 5959명이었던 면민들의 기부금으로 전액 부담되었다. 학교 규모는 붉은 벽돌의 교실 4칸, 교무실 1칸, 숙직실 1동, 작업실 1동, 창고 1동, 화장실 1동, 교장 관사 1동, 농업 실습지 3000평[9917.36㎡] 등이었다.

이후 이연철 씨는 운양의숙을 명실상부한 초등 교육 기관으로 전환하고자 결단을 내리고는, 서면공립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아 1927년 4월 1일 개교하기에 이른다.

서면공립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은 4년 2학급 복식이었다. 1929년에 발간된 『조선제학교일람』에 의하면, 교사 2명[일본인·한국인 각 1명]에 학생 수는 1학년 남자 32명·여자 8명, 2학년 남자 26명·여자 4명, 3학년 남자 29명·여자 3명, 4학년 남자 21명·여자 1명으로 총 124명이다. 학교 운영 경상비는 3417엔(円), 학생 1인당 경상비는 27엔(円)으로 기록되어 있다.

[학교 가서 공부하는 것만도 대단했지]

시대에 따라 바뀐 학교 이름만큼 그곳에서 배우던 학생들의 모습과 교육 환경, 교육 내용은 다르지만 이곳이 설월리와 인근 마을의 배움의 터가 되었던 것은 변함없었다. 서면공립보통학교를 다녔던 마을 토박이들의 증언에는 이런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 있다.

열 살에 서면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던 김정관[1932년생] 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영당말에 있는 서당에 다녔어요. 이원익 대감 탄생한 곳인데, 서당에 보통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다니다 입학하고는 안 다녔지요. 나는 열 살인가에 입학했어요. [서당에서는] 그렇게 많이 공부 안 하고 『천자문』 정도 떼고 초등학교[보통학교]에 들어갔지요. 그때 국민학교에 시험 봐서 들어갔어요……. 원 나이는 열 살이고 만 나이로 아홉 살이었지요. 왜정 때 서면보통학교에 다닌 거예요. 소하2동이고 걸어서 다닐 만한 거리였어요. 우리 다닐 때는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었는데, 남녀 57~58명 정도였습니다. 나는 일본말을 잘했어요, 교장선생님이 일본 사람이었고, 내 일본 이름은 가네다 데이깡이었어요. 그리고 4학년 때 해방돼 가지고, 이듬해 5학년 되었지요.”

1950년대 학교에 다녔던 최문락[1939년생] 씨는 6·25전쟁으로 학교가 불타서 천막에서 공부했던 기억을 끄집어 올렸다. “아 말이죠, 6·25 때 초등학교가 폭격을 맞았어요. 학교가 불타고 다들 정신없었지. 그래도 학교는 갔어요. 교실이 없으니깐 그냥 천막치고 공부할밖에. 앉은뱅이책상 같은 걸 만들어 가지고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수업을 받았죠. 그때 뭐 있어요? 칠판도 겨우 구해다 놓고 땅바닥에 나무꼬챙이로 글씨 쓰고. 참 어려웠던 시절이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정보제공]

  • •  김정관(남, 1932년생, 소하2동 설월리 주민)
  • •  최문락(남, 1939년생, 소하2동 설월리 주민, 동정자문위원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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