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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555
한자 愍懷嬪姜氏
영어의미역 Crown Princess Gangssi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지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자빈
출신지 경기도 광명시
성별
생년 1611년연표보기
몰년 1646년연표보기
본관 금천
대표관직 세자빈

[정의]

조선 후기 광명 출신으로 소현세자의 빈.

[가계]

본관은 금천(衿川). 고려 때 귀주 대첩의 영웅이며 벽상공신을 지낸 강궁진의 아들 강감찬의 출생지가 금천[현 서울특별시 금천구]이므로 금천강씨로 부른다. 아버지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640년(인조 18) 우의정을 지낸 강석기(姜碩期)[1580~1643]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高靈申氏)이다.

[활동사항]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는 1611년 5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627년(인조 5) 9월에 소현세자의 빈으로 간택되어 12월에 가례를 올렸다. 1636년(인조 14) 원손인 이석철(李石鐵)을 낳았고, 이어서 별손인 이석린과 이석견, 군주(郡主)인 딸 등 3남 3녀를 낳았다.

1636년(인조 14) 시작된 병자호란은 다음 해인 1637년 1월 삼전도의 굴욕으로 전쟁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한 조선은 청과의 약속에 따라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청나라에 보내게 되며, 민회빈 강씨 역시 1637년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 도착하였다. 소현세자는 왕실 가족과 수행원이 거처할 심양 관소를 열고, 이곳에서 조선 정부를 대신하는 공식 기관의 일을 수행하였다.

당시 심양에는 청나라를 반대하며 반청 운동을 하다가 붙들려 와 재판을 받던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처리를 포함해 전쟁 포로로 끌려와 공공연하게 노예 시장에서 매매되는 조선인 문제 등이 산적해 있었다. 돈이 있으면 조선인 포로를 사서 속환(贖還)시킬 수 있었으나, 당시 궁핍한 조선의 경제 사정은 개인은 물론 조정조차 이들을 돌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소현세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청국의 국력과 실상을 받아들이고 양국의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하여 청의 황제와 고관들과의 친목을 다지는 등 노력을 기울인다.

이때 민회빈 강씨는 현실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경제 활동을 통한 부의 축적과 이를 통한 포로의 속환 자금을 마련하는 일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이면에는 당시 청국이 개국 후 물품 부족과 함께 질 좋은 조선 상품에 관심을 가졌던 상황이 작용하였다. 민회빈 강씨는 농지 경작에 선진 농업 기술을 지닌 조선의 농법으로 매년 큰 수확을 거두었으며, 동시에 조선과 청국의 무역 거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리고 수입금은 조선인을 속환하는 자금으로 이용하면서 많은 조선인을 구하게 되고 더불어 심양관은 국제 무역의 거점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인조실록(仁祖實錄)』 23년 6월 27일조에는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포로로 잡혀 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라는 기록이 있어 민회빈 강씨의 탁월한 사업 경영과 수완, 그리고 이역만리에서 신음하는 백성을 위해 힘쓴 모습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여전히 청나라에 대하여 반대하였고, 특히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친청적인 행동에 대하여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에는 소현세자가 청국의 힘을 등에 업고 조선 조정에 대한 압력을 행사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었으나, 더 근본적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를 의심한 이유는 중화사상에 물들었던 친명적인 조정 세력이 지닌 청나라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조선 조정과 인조는 1644년(인조 22) 민회빈 강씨의 부친인 강석기의 조문을 위하여 소현세자와 함께 잠시 귀국할 당시에도 민회빈의 문상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으므로, 당시 불신의 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세자 내외는 같은 해 4월 2일 또다시 조국을 등지고 청나라의 연경에 머물게 되며 이때 서양 천주교 선교사인 아담 샬(Adam Schall)을 만나게 된다. 그러고는 새로운 서구 문명과 과학 기술을 접하며 관련 서적과 기구 등을 선물로 받는다. 마침내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1645년(인조 23) 1월 23일 세자 내외는 9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조선 조정과 인조는 여전히 세자 내외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며, 특히 청국에서 가져온 많은 재물에 대한 불신과 함께 민회빈 강씨와 왕의 총비인 조소용과의 반목은 적대적인 양상으로 치닫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현세자는 귀국 2개월 후 급작스런 병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고 세자의 의심스런 죽음에 뒤이어 소현세자의 아우인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된다.

이후 민회빈 강씨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조소용의 저주 사건 배후자로 지목되어 자신의 궁녀가 처형되고, 1646년(인조 24)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무고로 이해 3월 마침내 사사(賜死)된다. 이 옥사로 어머니와 친정의 4형제, 궁녀와 노비 등이 죽음을 당하고 소생인 이석철과 이석린은 제주도에 유배되어 병으로 요절하게 된다.

[학문과 사상]

민회빈 강씨는 중국 심양의 활동에서 살펴볼 수 있듯 비록 여성의 몸이었으나 남성 못지않은 기개와 총명한 재능을 지닌 실용적 여성 경영자로서 그 의미를 평가할 수 있다. 또한 현실에 대한 시대적 감각과 이에 대한 미래 지향적 사고를 지닌 인물임을 함께 엿볼 수 있다. 이와 함께 포로로 끌려 와 신음하는 백성을 위한 세자빈의 행동에서 덕과 애민의 사상을 지닌 여성으로의 모습도 보여 준다.

[묘소]

묘소는 광명시 학온동 산141-20번지에 있다. 사적 제3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처음에는 민회원으로 불렸으나 1903년(고종 40) 영회원(永懷園)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애기릉’ 또는 ‘아왕릉(阿王陵)’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변에 치석된 석재와 기와 조각이 있어 부속건물의 흔적을 추정할 수 있다. 봉분 앞으로 혼유석과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 석양, 석마, 석호 등의 석물이 있으며 비석은 없다.

[상훈과 추모]

73년이 지난 1718년(숙종 44) 민회빈 강씨의 무고함이 판명되어 복위와 함께 민회(愍懷)라고 신원되었으며, 같은 해 윤 8월에 숙종은 민회빈 강씨의 총명함과 덕을 칭송하며 제문을 지어 원혼을 위로하였다. 또한 민회빈 강씨의 아버지 강석기도 관작이 복위되었으며 그의 형제들도 함께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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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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