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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513
한자 李厚源
영어음역 Yi Huwon
이칭/별칭 사심(士深),우재(迂齋),남항거사(南港居士),충정(忠貞),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동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강원도 양구군
성별
생년 1598년연표보기
몰년 1660년연표보기
본관 전주
대표관직 우의정

[정의]

경기도 광명시에 묘소가 있었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남항거사(南港居士)이다. 세종의 다섯 번째 왕자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7세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한(李漢)이고, 할아버지는 이인건(李仁健)이며, 아버지는 군수 이욱(李郁)이다.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로 문정공(文貞公) 황정욱(黃廷彧)의 딸이다. 부인은 참판 신희도(辛喜道)의 딸이다. 아들로 이선(李選)을 두었다.

[활동사항]

이후원(李厚源)[1598~1660]은 김장생(金長生)에게서 배웠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후 태인현감에 제수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공을 세웠고, 1627년(인조 5) 왜구를 잡은 공으로 총융사(摠戎使)가 되었으며, 1628년 포로를 잡은 공로로 녹훈되었으나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후 단양군수와 안산군수를 거쳐 한성부서윤을 지냈다.

1635년(인조 13) 익산군수로 있다가 같은 해 10월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홍서봉(洪瑞鳳)·김상헌(金尙憲) 등의 천거로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 세자시강원문학을 거쳐 1636년 12월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여 김상헌 등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였다. 이 무렵 이후원은 대장 신경진(申景鎭)의 비겁한 죄를 탄핵하고, 남한산성에서는 독전어사(督戰御使)를 겸임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이 청군에 포위되어 김류(金瑬) 등이 왕을 강화도로 모시려 하자, 왕이 남한산성을 몰래 떠나 강화도로 옮기는 것은 위태로운 계책임을 주장하였고, 남한산성을 적극 고수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때 최명길(崔鳴吉) 등이 주화론(主和論)을 펴자, 죽기를 각오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화의(和議) 후 세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는 문제에 반대하였다. 1637년(인조 15) 품계가 통정대부에 오르고 승지에 제수되었으며, 호조참의가 된 후 외직을 자청하여 광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639년(인조 17) 다시 승정원의 승지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수원부사에 천거되었으나 왕이 이후원을 곁에 두고자 하여 병조참지로 임명되었다. 그 후 충청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민력을 무리하게 쓰지 않고 사풍(士風)을 변경시켰으며, 군정(軍政)을 닦는 데 힘썼다. 1642년(인조 20) 사간원대사간, 이듬해 가선대부로 한성부우윤에 올랐다. 이후 강화부유수를 거쳐 사간원대사간에 재임되었다.

1644년(인조 22) 심기원(沈器遠)이 좌의정으로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임하면서 심복의 장사들을 호위대(扈衛隊)에 두고 전 지사(知事) 이일원(李一元) 등과 모의하고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수장이 되어 이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듬해 호조참판에 오른 뒤 사헌부대사헌을 지내고 1646년 형조참판이 되어 회맹연에 참여하였으며 가의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1647년(인조 25) 다시 사간원대사간이 되었고, 승정원도승지와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목민에 힘쓰고 『소학(小學)』을 간행하여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1649년(인조 27) 인조가 별세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형조참판에 이어 승정원도승지와 사헌부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50년(효종 1) 소를 올려 “김자점(金自點)은 귀양 보내고, 유계(兪棨) 등은 처벌하지 말며, 성균관 유생의 동맹 휴학인 권당(捲堂)은 관용하지 않을 수 없고, 어진 정승이 정계를 떠날 때는 예우가 있어야 하며, 이이·성혼 등 두 신하의 학문과 도덕의 실상을 임금이 알아주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효종의 북벌 모의에 참모가 되어 전함 200척을 준비하는 등 북벌 계획에 앞장섰으며, 그 뒤 1653년 승정원도승지로서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5년(효종 6) 예조판서로 재임할 때는 추쇄도감(推刷都監)의 제조가 되어 전국의 노비를 추쇄하여 강화(江華)를 방비케 하였으며, 또한 장악원(掌樂院)에 소장되어 있는 『악학궤범(樂學軌範)』을 개간하여 사고(史庫)에 분장하게 하였다. 이어 한성부판윤, 형조·공조의 판서를 거쳐, 사간원대사간이 되었으며 곧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1657년(효종 8) 9월 우의정에 올라 효종을 도와 북벌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송준길을 병조판서, 송시열을 이조판서에 추천하여 임명케 하는 등 인재 등용에도 힘썼다. 이듬해 정월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왕의 병이 심하여 조정에 나아가 세자의 일을 도왔고, 1659년(효종 10)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논의에 대하여 송시열과 함께 기년제(朞年制)를 주장하여 실현시켰다.

만년에는 세자좌부빈객·지경연사·지춘추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청개하고 인화를 중히 여겼다. 선을 좋아하여 능변으로 악을 질시하였으며, 바쁜 관직 생활 중에도 경사(經史)를 공부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노년에 광주(廣州) 선영에 집을 짓고 ‘우재(迂齋)’라는 현판을 달고 살았다. 1660(현종 1) 노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73세였다.

[묘소]

묘소는 광명시 일직동 호봉골에 있었으나 1704년 서울특별시 강남구 자곡동 대모산 부근으로 이장되었다. 이후원의 묘는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러 『시흥군지』 등에 광명 일대의 대표적인 인물의 묘소로 손꼽혀 왔다.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은 2009년 12월 31일 서울시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685년(숙종 11)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정사공신으로 봉호는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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