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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394
한자 鄕會
영어의미역 Village Assembl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조선/조선,근대/개항기
집필자 안홍민

[정의]

조선시대 광명 지역에 거주하는 사족(士族)이 중심이 되어 운영한 지방 자치 회의기구.

[개설]

향회(鄕會)는 조선시대 사족의 향촌 지배 기구로서 제1차 시흥농민봉기 때 광명 지역의 농민이 모여 봉기를 일으키게 된 빌미가 된 지역 모임이다. 향회에서 ‘향(鄕)’은 1개의 관읍을 상징한다. 따라서 향회는 군현(郡縣) 단위에서 공론을 수렴하는 회의체이다. 향회는 조선 전기부터 군현 단위에서 시행된 향규(鄕規), 향약(鄕約) 등에서 운영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구성원이 일반 사족에서 향리층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향회는 기본적으로 향론을 통일하고 기강을 유지하는 기구였지만, 대체로 수령의 권한을 견제하고 이서층(吏胥層)을 통제하며 지방 사족의 공통된 이해를 지키면서 민(民)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기구였다.

[내용]

조선 초기부터 16~17세기까지는 향안(鄕案)에 이름이 수록된 양반인 향원(鄕員)들로 구성된 모임이었으며, 또한 향원 가운데에서 뽑힌 향임(鄕任)의 모임을 의미하기도 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양반 체제의 붕괴와 함께 수령의 단순한 부세 자문기구로 성격이 바뀌고, 구성원도 사족에서 이향층(吏鄕層)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사족으로 구성된 향회에서 선출되던 향임을 수령이 임면하게 되었고, 향회의 통제 아래 있던 이서층의 임면권이 이서층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행사되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수령을 보좌하는 기구로서의 향회도 있었지만 피지배층의 성장에 따라 일부 평민까지 참여하는 경우가 발생하였으며, 점차 지방자치 조직의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또한 수령과 향회 사이에 대립·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로 인해 농민 봉기와 같은 민란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본래 합법적인 제도로서 시행된 것이 아니라 지방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져 운영되어 온 향회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합법화의 길을 걷게 된다. 최초의 시도는 1894년 7월에 군국기무처 의안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때 향회는 1894년 10월부터 시행될 예정이었던 조세금납화를 비롯한 새로운 조세 제도를 담당할 지방 기구이자 탁지부의 하부 기구였다. 그러나 을미의병 등과 같은 양반층의 저항으로 2차 갑오경장 때 이 안은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1895년 11월과 1906년 9월에 만들어진 ‘향회조규(鄕會條規)’에 의해 부분적으로 합법화된다.

하지만 1907년 5월 일제는 향회가 ‘지방관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기구’라고 하여 폐지하고, 그 대신 지방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향회는 지방위원회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각 군에 지방 위원을 한 명씩 두었다. 지방 위원은 통감부가 제시한 기준에 따라 통감부 관리와 한국인 군수가 협의하여 선발하였다. 그렇지만 향회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도 많았고, 어떤 지역에서는 더욱 근대적인 형태로 발전하여 민회(民會)·민의소(民議所) 등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향회 체제는 본래 지역의 사족이 지역을 지배하기 위한 기구였다. 하지만 이러한 향회는 그 기능만으로 본다면 현대의 지방의회와 유사한 점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향회는 지방 사회에서 민주주의적 지향이 발전되고 법제화되는 과정 속에서 양반 중심의 사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말미암아 향회는 근대 이후로 지역에서 민회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은 한국 및 광명 지역의 민주주의 역사 가운데 지방의회의 형성이라는 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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