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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392
한자 執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직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조선/조선,근대/개항기
집필자 안홍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연도/일시 1898년연표보기

[정의]

근대 개항기 광명 지역 자치조직의 우두머리.

[개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지방 행정 단위는 현(縣)까지였고, 그 아래로는 지방의 자치 조직으로 면·방·사, 그 밑에 이(里)·촌(村)·동(洞)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면(面), 방(坊), 사(社)의 우두머리가 집강(執綱)이다. 지금의 면장이나 읍장에 해당된다. 이들은 향소의 좌수나 별감의 천거에 의해 수령이 임명하여 행정 계통상으로는 수령보다 향소 또는 향약의 관할 아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행정 조직상 가장 말단에 위치하였던 이들은 1898년(고종 35) 1차 시흥농민봉기가 일어났을 때 주도 세력이 되었다.

[담당직무]

주로 주현(州縣)의 행정 명령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특히 조세 납부를 지휘하는 등 지방 관청의 심부름을 하였으나, 점차 정령(政令)의 선포 등 행정 실무를 떠맡게 되면서 면 집강들이 향약의 일까지도 맡게 되었다.

[관련기록]

집강과 관련하여 시흥농민봉기를 주도한 김원록(金元祿), 성우경(成禹慶), 하주명(河周明), 민용훈(閔用勳) 등에 관한 기록이 『각사등록(各司謄錄)』 근대편에 실려 있다. 제목은 「김원록 외 3명의 시흥군 소요 사건에 대한 질품」이다. 발송자는 평리원재판장 민경식(閔景植), 수신자는 법부대신 육군부장훈일등 이지용(李址鎔)으로 되어 있다. 1905년 4월 17일[光武九年四月十七日]에 보낸 질품서(質稟書) 제4호 문서이다. 집강이 언급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피고 김원록(金元祿), 성우경(成禹慶), 하주명(河周明), 민용훈(閔用勳) 관련 건에 대한 검사 공소 심리(檢事公訴審理) .. (중략) .. 성우경이 진술하기를 ‘작년(1904년) 음력 8월 4일 군수와 만나 먼저 책실(冊室)에 찾아갔는데 책실에서 교체하여 온 군수가 ‘내일 본군의 민들이 역부(役夫)의 일로 모이니 성 생원이 사람들에게 잘 얘기해서 해산하고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5일 한천교(寒川橋)에 가니 때는 이미 오시를 넘겼는데, 사람들이 어우의둔(魚喁蟻屯)에 모여 있었습니다. 책실에서 부탁 받은 내용을 사람들에게 해산할 것을 알리고자 했지만 난에 참가한 사람들 중 딱 가리켜 말할 만한 곳이 없어 각 동(洞)의 집강을 호출하고 좌장(坐場) 내의 우두머리를 불러 말하게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 (중략) .. 이용(李容)이 진술하기를 ‘저는 본군의 42개 마을의 집강 및 동임(洞任) 등과 회동하고, 일직리(日直里)에 사는 민용훈이 보낸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수정하여 안핵사에게 올렸습니다.’라고 하였다 .. (중략) .. 오한철(吳漢哲)이 진술하기를 ‘작년 음력 8월 3일 아침 일찍 민(閔) 주사(主事) 댁에서 저를 불러 가니 종이 두루마리 하나를 내어 주면서 제게 ‘이것은 긴요한 서찰로 너는 박달리(博達里)의 집강 임오상(林五相) 댁에 전하고서 회답을 알려 달라.’고 하여 저는 그 말에 따라 서신을 전하였는데, 나중에 들으니, 이는 긴요한 서찰이 아니라 무리를 모으기 위한 통문이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 (하략)”

[변천]

처음에는 지역의 덕망 있는 사람이 추대되어 백성들을 교화하면서 자치(自治)하는 일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점차 지방 관리의 심부름꾼과 같이 되었고 나중에는 향약의 일까지 맡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집강들은 지방 행정의 가장 말단에 위치하면서 농민들과 접촉이 많았으며, 위치도 수령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은 정도였다. 따라서 이들은 1898년 광명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을 때 이를 주도할 수 있는 세력이 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광명시지』 1(광명시, 2006)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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