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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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田穉珪 |
영어음역 | Jeon Chigyu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여수경 |
성격 | 종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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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
성별 | 남 |
생년 | 1878년 1월 5일 |
몰년 | 1944년 2월 23일 |
본관 | 담양(潭陽)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기독교 종교인.
[개설]
본관은 담양(潭陽). 봉예공(奉禮公) 전진(田晉)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창복(田昌福)이며, 아버지는 전달용(田達龍)이다.
[활동사항]
전치규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0년 기독교인이 된 뒤 원산으로 가서 캐나다인 침례교 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밑에서 6년간 성경 공부를 하였다. 이 기간에 『신약성경』을 세 번 필사하였고, 교단에서 사용하는 『복음찬미가』 출간도 맡아서 하였다.
1916년 목사가 되었고, 1924년 이종덕 목사에 이어 3대 감목(監牧)으로 취임하여 행곡교회를 이끌면서 10년 동안 봉직하였다. 이 해에 제19회 대화회를 행곡리에서 소집하였는데, 이때 교역자는 70명, 전도인은 160명이나 되었다. 전치규는 특히 전도에 주력하여 감목으로 재직한 10년 동안 124명의 전도인을 시베리아, 만주 일대에 파송하는 개가를 올렸다. 펜윅이 네비우스 선교 정책으로 장로교나 감리교의 전도 구역이 아닌 지역을 물색하다 보니 원산에서 가까운 시베리아나 만주, 몽골까지 전도의 손길을 뻗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초기 동아기독교[침례교 전신] 시절 인명 피해도 많았다. 1925년 몽골 지역에 파견된 이현태 선교사는 몽골인에게 피살되었고, 만주 지역에 파견된 김상준 외 5~6명의 전도인들은 한국독립당 군사들에게 일본의 밀정으로 오해를 받아 피살되었다. 간도의 종성동에서는 김영국·김영진 형제가 공산군에게 피살되었고, 정춘보는 총살당하였으며, 이규헌은 납치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다.
1934년 전치규에 이어 제4대 감목에 김영관 목사가 취임하였다. 이 무렵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교단은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였고, 교회는 감목의 이름으로 “절대로 신사참배나 궁성요배는 할 수 없다”는 공문을 보냈다. 이 일로 교단의 지도자인 김영관, 백남조, 이종덕, 전치규, 노재천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42년 일제가 『복음찬미가』에 수록된 찬미가 내용을 꼬투리 잡아 전치규, 김영관을 비롯한 지도자급 인사 32명을 체포하였다. 전치규는 이듬해 함흥형무소로 송치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향년 6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신약성경』, 『복음찬미가』 등의 저서가 있다.
[상훈과 추모]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에서 기독교 순교자로 추대하였으며, 『순교열전』을 발간하여 전치규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삶을 널리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