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6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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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 |
영어음역 | Righteous Arm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장희흥 |
[정의]
1876년에서 1910년 사이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의병운동.
[개설]
한말 일제의 침략으로 식민지화의 위기가 심화되면서 이를 반대하는 민족운동이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사회경제적 이해 관계, 운동의 방법에 따라 의병항쟁(義兵抗爭)과 계몽운동(啓蒙運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의병항쟁은 반일(反日)적인 입장에 있던 모든 세력이 모여 계급 연합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항쟁의 발전에 따라 점차 계급적인 제한성이 있던 보수적 유생층은 탈락하고, 특히 1904년 이후에는 의병의 주체로서 민중층이 성장하였다. 민중층은 의병 전쟁을 통하여 개별적이고 분산적으로 전개되던 민중 항쟁을 결합하여 반일적인 전쟁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울진 지역에서도 의병 항쟁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의병의 봉기]
1. 강릉 민용호 의병과 울진 의병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로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 체결되고,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은 부인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독일·프랑스와 함께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이 동양의 평화에 해롭다는 구실을 붙여 반환을 요구하는 삼국간섭(三國干涉)이 있었다. 삼국간섭 이후 민비(閔妃) 일파가 이범진(李範晋) 등을 기용하여 친러 내각을 구성하자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친일 내각을 수립하고, 단발령(斷髮令)을 시행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충청도 보은(報恩)에서 문석봉(文錫鳳)이 처음으로 기병한 이후 제천에서 유인석(柳麟錫) 등이 기병하였다. 울진 등의 동해안 일원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동해안 지역 의병을 대표한 것은 강릉의 민용호 부대였다.
민용호는 원주에서 일어나 오영도총독(五營都摠督) 권익현을 북각읍소모사(北各邑召募使)로 임명하여 하양·간성·고성·통천·흡곡·안변 등 6읍을, 권명수(權明洙)를 영외북각읍소모사(嶺外北各邑召募使)로 임명하여 정선·양구·화천·회양·평강·김화·금성 등 7읍을, 이경환(李景煥)과 김윤희(金允熙)를 정선·삼척·울진·평해·흥해 등 5읍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에 울진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강릉 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민용호 부대는 원산 공략을 위하여 북진하였다가 패배하였다. 울진까지 퇴각한 민용호는 8월 초순 북상을 결심하고 의진의 북상을 알리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울진에서 출발한 강릉 의병은 관군의 집요한 추격을 당하면서도 계속 북진하여 10월 5일 압록강을 건너가 백두산 아래에서 의병을 해산하였다.
울진은 민용호의 강릉 의병의 물적·인적 기반을 제공해 주었고, 민용호가 원산 침공 실패 후 의진을 새롭게 정비하여 북상을 가능케 해 주었다. 특히 춘천 의병의 별동대였던 성익현이 민용호의 강릉 의병과 연합하여 활동하면서 러일전쟁 이후 성익현이 울진을 중심으로 의병을 재기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울진에서는 민용호 의병과 보조를 같이 하여 주병헌(朱秉憲)·전치일(田穉一)이 막료 이성린(李聖麟) 등과 더불어 울진에 유진소(留鎭所)를 설치하고, 유진장으로 주병헌을 추대하였다. 평해에서도 향인들을 중심으로 유진장 장필한(張弼漢)과 막료 황경희(黃景禧)·안위(安瑋)·정수(鄭洙) 등이 유진소를 조직하였다.
이 유진소는 설치 당시부터 향인과 아전 사이에 영도권 문제로 알력이 있어 향인만으로 조직된 것으로, 후포항에 잠입한 일본 어부 8명을 사살하였다. 한편 이강년 부대의 막료였던 장진두(張鎭斗)[일명 張君七]는 영동 남부 지역에서 활동하였는데, 삼척군 하장면 삼미원(三味院)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2. 울진 지역의 농민항쟁
초기 의병은 갑오개혁 정권의 붕괴 이후 대체로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 사이 각지에서 농민층의 항쟁이 일어나고, 활빈당과 같은 무장 농민군이 활동하였다. 이때 울진에서도 여러 차례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먼저 1899~1900년에 전호기(田鎬基)를 중심으로 한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1899년 10월 신임 울진군수 김용규(金容圭)가 나주에서의 상납금을 체용(替用)하여 군수직을 매득하였는데, 이를 보충하기 위해 염민(鹽民)으로부터 돈을 거두고, 요민(饒民)에게 관아 수리금을 걷는 등 인민을 억압하였다. 이에 전호기가 관아를 점거하자, 군수는 수지 명세를 일반에게 공개하고 강제로 징수한 것은 반납하여 축출은 면할 수 있었다.
그 후 1900년 11월경에 조종국(趙鍾國)이, 1902년에도 군민들은 군수가 부민(富民)들에게 각종 명목으로 수탈을 하였으므로 이를 도로 찾게 해달라고 내부에 호소하였다. 1902년 12월에는 정부의 양전지계사업(量田地契事業)과 관련하여 농민 항쟁이 발생하였다. 당시 군수 허후(許逅)는 강원도의 지계감리로 구권(舊券)과 관계(官契)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부정 수탈을 하였다. 장익겸(張益謙) 등이 1902년 8월 18일 관아로 쇄도하여 군수를 축출하였다.
이후 항쟁에서 중요하게 거론되었던 문제는 조세 수취 문제이다. 이 조세 수취는 일제가 행한 화폐 정리 사업과 관련되어 있다. 1907년에는 결세를 1년 전[혹은 반년 전]에 선납(先納)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결세를 인하하기로 하자 장석태(張錫泰)·전배근(田培根)·장진수(張鎭守)·최경호 등이 이미 납부한 결세의 환급을 요구하면서 항쟁을 일으켰다.
다른 지역의 의병과 마찬가지로 울진의 의병 투쟁도 조세 문제를 거론하였다. 1906년 말 읍내에 의병 300여 명이 군기를 탈취하고 상납할 엽전을 소각하였다. 의병의 활동은 울진과 평해를 관장하는 세무주사 원경상(元敬常)이 민간에서 엽전으로 강제 징수하여 신화로 교환 납부함으로써 이익을 챙기자 더욱 고조되었다. 1907년 농민 항쟁을 주도하던 장석태·전배근·장진수 등은 그 전 1905~1906년 울진 지역의 의병과 관련이 있었고, 이후 바로 의병에 투신하였다..
[의병의 재기]
1. 신돌석 부대의 활동
전국적으로 소강 상태에 들었던 의병 항쟁은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다시 폭발하였다. 특히 1905년 보호조약 이후에는 국권 회복이라는 명확한 목표 하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미 일본 상인과 어민들의 침탈을 경험하면서 반일 의식이 성장하였던 울진을 비롯한 동해안 지역에서는 러일전쟁을 겪으면서 이런 위기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1905년 5월 28일 울진 고포(姑浦) 앞 바다에서 일본 군함 2척과 러시아 군함 1척이 서로 싸웠다.
이 시기 울진 지역의 의병 활동은 영해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신돌석 부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평민 의병장 신돌석은 1906년 4월 의병 부대를 결성하여 1908년 10월까지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신돌석 의병부대는 영해·영양·평해를 중심으로, 강원도 울진·삼척·양구 그리고 경상북도와 충청북도까지 활동했다. 영양·청송·울진·영해·영덕 등지를 차례로 공격하여 관아를 파괴하고 군기를 획득하였으며, 군수와 기타 관속들의 죄를 추궁하였다.
신돌석 부대는 활동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울진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1906년 4월 울진 읍내를 공격하기 위해 영양군 동북부 지방에 머물면서 군수품을 조달하고 울진군의 정세를 살폈다. 그러나 4월 26일 원주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패퇴하여 영양·진보의 접경 지대까지 후퇴하였다. 6월이 되자 300명의 군사로 울진군 읍내에 진격하여 군아(郡衙)와 군기고(軍器庫)를 부수고 군기를 획득하였다.
신돌석 의병의 활동이 계속되자 정부에서 이를 토벌하기 위해 대구진위대와 원주진위대가 출병하였다. 양 진위대는 평해 부근에서 협공하여 의병 부대를 쫓아내기는 하였지만 신돌석을 체포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신돌석 부대는 1907년이 되면서 일월산을 근거로 활동하였다. 1907년 7월 이후 통감부는 의병 진압을 위해 경상북도 경무서 관할 하에 안동분서와 영해분서를 두었으며, 강원도 경무서 관할 하에 울진분서를 두었으며, 울진분서 아래 삼척분파소, 평해분파소가 배치되었다.
1907년 11월 이후에는 신돌석 부대는 이강년 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다가 평해군 선미동(仙味洞)에 주둔하여 투쟁하였다. 1907년 12월 하순 신돌석은 전국연합의병부대의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으로 서울 진공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되돌아왔다. 1908년 1월 10일 영양군 북면에 이르렀을 때, 안동수비대의 습격을 받아 크게 패하게 되었다. 이후 게릴라식 투쟁으로 전환하였다. 10월 17일 울진군 서남쪽 약 60리 지점에서 울진군분견소 헌병대와의 마지막 전투 후 11월 중순경 해산하고 말았다.
2. 성익현·정경태 부대의 활동
성익현(成益賢)은 춘천부 관군의 초장(哨長)을 지냈으며, 1896년 1월 의거한 이소응(李昭應)의 춘천 의병에 합류하여 춘천 의병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이후 춘천 의병이 무너지자 민용호의 강릉 의병과 합세하여 활동하였다. 그 후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울진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에서 스스로 ‘관동총독’, 혹은 ‘관동창의대장’이라 칭하면서 활동하였다.
이때 울진에서는 다른 소규모의 의병 부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성익현은 정경태(鄭敬泰)·이상렬(李相烈)·변학기(邊鶴基) 등의 의진을 규합하여 정경태를 도총장(都總將) 혹은 중군장(中軍將)으로 삼아 평해·울진 지역의 일본 경무고문분파소 등을 습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때 성익현 부대는 변학기를 도총독(都總督)으로 삼고 경상북도 지방에서 활발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던 이강년 부대와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다. 10월 22일 재차 성익현 의병 부대는 울진 읍내를 공격하였다.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1907년 12월에 들어 일본군도 적극적으로 토벌에 나서 경상북도 북부와 강원도·충청도로 연결되는 지역의 의병 활동에 대한 일본의 본격적으로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 많은 의병들이 해를 입어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울진에는 삼척 중대에서 일개 소대의 군대를 주둔시켜 의병 진압에 나섰다. 의병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귀순도 늘어났다. 이에 성익현 의병진은 당규(黨規)를 만들고 그것을 어기면 가차 없이 총살을 시키기도 하였다. 1908년 5월 중순 이강년 의병장이 안동 서벽(西碧)으로 옮기자 성익현은 이강년 부대에 참여하였다.
이후 성익현이 1908년 음력 5월 북간도로 떠나자 뒤를 이어 정경태(鄭敬泰)가 의병진을 이끌었다. 부대를 이끌면서 스스로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이라 칭하며 강원도 울진·삼척·평해 및 경상북도 봉화·영양·안동에서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각지의 의병 활동이 크게 위축된 이후 게릴라 전투를 통해 일본군을 괴롭혔다. 또한 정경태는 반의병 활동에 앞장선 사람들을 징계하는 활동을 많이 전개했다. 이를 통해 정경태는 점차 소규모로 ‘화적화(火賊化)’되는 의병들의 사기를 높이고, 또한 자신의 부대가 올바르게 인식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울진 출신 의병]
1906년 이후 평민 의병장을 대표하는 신돌석 부대와 성익현·정경태 부대가 동해안 일원에서 활동하면서, 울진과 평해는 중심 지역이 되었다. 울진 출신 사람들은 이 의병 부대와 직간접적인 관련 속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1905년 12월 7일 울진 인사들, 전세호(田世浩)·전매정(全梅亭)·주낙조(朱洛朝)·최경호(崔慶鎬)·김용욱(金容旭)·장진수(張鎭洙)·전배근(田培根)·박병률(朴炳律) 등은 흥부(興富)시장에 모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의논하였다. 그때 이강년 휘하의 김형규(金炯奎)[혹은 金顯奎]가 1906년 2월 울진에 도착하여, 울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울진 인사들은 신돌석 부대에도 참여하였다. 이때는 울진군수 윤우영(尹宇榮)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싸웠는데, 전세호와 김용욱(金容旭)[일명 致彦, 노랑장군]의 활약이 대단하였으며, 삼척의 오십천 전투에서는 중군장 최경호가 활약하다가 생포되기도 하였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 의병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9월 원주진위대 출신 민긍호가 이끄는 부대가 울진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부대의 울진 침공에는 전 진위대 하사관이었던 울진 후정리(後亭里) 최경호가 이를 도왔다.
그 외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한편 신돌석·성익현·정경태 등의 의병활동에 참여했다가 귀순한 사람들도 많았다. 의병 활동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 변화로 인해 비록 귀순하였지만, 그들도 분명 항일 정신에 입각해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의병이었음은 분명하다.
울진 지역에 의병이 활발해지면서 행정이 마비되고 부호들도 피난 가는 사태에 직면하기도 하였고, 또한 의병과 일반 주민과도 긴밀한 협조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의병의 습격으로 군청·경무서·우편소 등의 건물이 파괴되고, 세금 징수와 우편업무 등의 행정이 마비된 상태였다. 곧 의병이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얼마나 치열하게 저항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의병의 전환]
1. 의병 근거지의 이동
1909년에 들면서 의병의 반일 투쟁이 산악 지대를 근거로 한 소부대 활동으로 장기전에 돌입하게 되자 일본군은 ‘남한대토벌’을 단행하였다.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간에 걸쳐 의병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전라도 지역을 대상으로, 뒤이어 경상도의 일월산, 황해도에서도 실시되었다.
이 토벌 후에 의병 활동은 더욱 분산되고 소규모가 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중심지도 황해도·경상북도·강원도 등의 산간 지역으로 옮겨갔다. 울진 지역에서 의병 활동도 점차 위축되면서 소백산 지역을 근거로 한 정경태의 부대가 남아 1910년 강점 이후까지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점차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요동 지방이나 간도, 노령 연해주로 이동하는 의병 부대가 늘어났다. 의병 전쟁에서 무장 항쟁의 독립 전쟁으로 형태 전환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독립 전쟁으로의 전환은 당시 국외에서 일어나던 계몽운동 계열의 독립군 기지 건설과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울진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 부대도 이런 전환의 모습을 보였다. 먼저 성익현은 1908년 5월경 북간도로, 의병 중군장이었던 최경호는 가족과 함께 만주 임강현(臨江縣)으로 이주하여 독립군을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그 외 신돌석 부대에서 활동하던 기성면의 원세찬(元世燦)·원세우(元世遇)·원세명(元世明)·원세우(元世佑)의 집안 사촌형제들은 후에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외 남충호(南忠鎬)와 윤성렬 등이 있었다.
2. 계몽운동과의 결합
의병들이 국외 만주 지역으로 그 근거지를 이동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을 때, 계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에 동참하는 인사들이 늘어났다. 1907년에 전개되었던 국채보상운동도 계몽운동의 일환이었다. 계몽운동은 서울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었다.
울진에서도 이 때 사립학교가 세워졌다. 학교 설립의 중심 인물은 주진수(朱鎭洙)와 황만영(黃萬英)이었다. 주진수는 관동학회와 관련을 가지면서 1907년 10월에 원남면[현 매화면] 매화리에 만흥학교(晩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기성면 사동의 황만영은 주진수와 의논하여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설립하였다.
또한 독립 기지 건설 운동에 울진의 주진수·황만영 등이 참여하여 이주민을 모은 뒤, 만주 유가현 삼원보에 경학사(耕學社)를 만들고, 이어 군인 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창설하였다. 신흥강습소는 후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바뀌었다. 울진 의병에 참여자 중 국외 독립 기지 건설에 참여한 사람은 평해 직산리(直山里)에 있던 이희영(李曦榮) 집안이다.
국내에서 각기 전개되던 의병항쟁 계열과 계몽운동 계열이 독립 전쟁, 무장 항쟁이라는 방안에 의해 민족운동으로 결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의병 자체의 근거지 이동이라는 측면과 의병 활동에 동조하던 일부의 계몽운동론자들의 결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