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3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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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景忠壇祭壇碑 |
영어의미역 | Memorial Monument of Gyeongchungdan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 233-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인표 |
성격 | 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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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932년 11월 |
관련인물 | 최시창|최면 |
재질 | 화강암 |
높이 | 200㎝ |
너비 | 38.5㎝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 233-1 |
소유자 | 강릉최씨 사간공파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에 건립된 최시창·최면 부자를 기리는 제단비.
[개설]
최시창과 최면 부자가 단종 복위와 관련하여 순절하고 나서 1458년(세조 2) 동학사(同鶴寺)의 한 스님이 사육신(死六臣)을 제사하였는데, 이를 들은 세조가 비단 등을 내렸고, 1464년(세조 10)에 각(閣)을 전(殿)으로 만들고 다시 혼을 불러 숙모전(肅慕殿)이라 하였으며, 1807년(순조 7) 여름에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렸다. 울진 지역의 후손들은 1904년부터 1963년 사단법인 숙모회가 발족할 때까지 매년 쌀 한 가마씩을 보내 제향을 도왔다.
[건립경위]
1932년 5월 울진 지역의 유림과 강릉최씨 사간공파 후손들은 최시창과 최면 부자의 충절을 기리고자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 233-1번지 죽포마을 종택 옆에 경충단과 제단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 죽포마을 국도 7호선 도로변인 강당골 입구에 있다. 강릉최씨 사간공파 종택인 매죽당에서 동쪽으로 국도 7호선의 지하 통로를 이용하거나, 종택 동쪽을 지나는 국도 7호선에서 바로 경충단 제단으로 갈 수도 있다.
[형태]
경충단 제단비는 특별한 장식을 하지 않은 옥개형의 가첨과 비신, 귀부를 갖추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머리를 약간 튼 형태의 귀부 위에 비좌가 있어 비신을 고정하고 있다. 비석의 규모는 옥개형 가첨의 너비가 74㎝, 폭 46㎝, 높이 34㎝이며, 비신은 너비 38.5㎝, 높이 132㎝, 두께 18㎝이다. 비좌는 사각형으로 가로 55㎝, 세로 42㎝, 높이 10㎝이며, 귀부는 높이 24㎝, 길이 50㎝로 전체 높이는 200㎝이다.
[금석문]
비신의 중앙에는 단종 때 순절한 신하로 삼군도진무사인 정재 최선생의 경충단 비석이라는 뜻으로 세로 두 줄로 “단종조순절신삼군도진무사정재최선생경충단지비(端宗朝殉節臣三軍都鎭撫使貞齋崔先生景忠壇之碑)”라고 새겼으며, 두 번째 줄은 첫 자를 한 칸 내려 적었다. 글자의 크기는 가로 9㎝, 세로 9㎝이다. 측면에는 비문을 지은이와 글쓴이, 비석을 세운 연대가 기록되어 있다.
비문을 지은이는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경연춘추관의금부성균관사규장각직제학세자시강원검교보덕여흥민씨병승(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義禁府成均館事奎章閣直提學世子侍講院檢校輔德驪興閔氏丙承)”이라 하여 가선대부의 품계를 지니고 이조참판, 동지경연춘추관, 의금부, 성균관사, 규장각직제학, 세자시강원 검교보덕의 관직에 있었던 여흥민씨 민병승이고, 글쓴이는 “가선대부시종원시종완산이종공(嘉善大夫侍從院侍從完山李鐘恭)”이라 하여 가선대부의 품계를 지니고 시종원 시종의 관직에 있었던 완산이씨 이종공이라고 하였다.
뒷면과 옆면의 글자 크기는 가로 2.5㎝, 세로 2.5㎝이다. 비석을 세운 때는 비석의 측면에 “고종기원후육십구년임신남지월상한(高宗紀元後六十九年壬申南至月上澣)”이라는 연대가 있어 1932년 11월 상순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후면은 최시창 부자의 행적을 서술한 비문으로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종이 왕위에서 몰려난 다음해인 1456년(세조 2)에 최시창·최면 부자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사육신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이때 최시창의 둘째 아들 최반(崔泮)이 죽음을 면하고 울진군 죽포리[지금의 매화리 인근]에 살게 되었다. 공의 이름은 최시창(崔始昌)이요 호는 정재(貞齋)다. 본관은 강릉(江陵)이니 경흥부원군 충무공 최필달(崔必達)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최치안(崔致安)이며, 할아버지는 대사간직제학(大司諫直提學)을 지낸 최복하(崔卜河)이다. 최복하는 고려시대 공양왕이 폐위되어 삼척시 궁촌 부근에 유폐되었을 때 장군 임제(林悌), 장천영(張天永) 등과 복위시키려다 순절하였으며, 공의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최명달(崔明達)이다. 아들 최면은 충성스럽고, 곧음이 크게 드러났다. 단종을 지키려 했으나 실패하여 정기를 끝내 다하지 못하였다. 1458년(세조 2) 동학사(同鶴寺)의 한 스님이 사육신을 제사하였는데, 이를 들은 세조가 비단 등을 내리고, 1464년(세조 10)에는 각(閣)을 전(殿)으로 바꾸어 숙모전이라 하였다. 그 후 1807년(순조7) 여름에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렸다. 그 후 고을 사람들이 단을 만들어 공을 생각하니 이는 하늘의 도리요 백성의 떳떳한 의지를 관철시킨 것이다.
[현황]
산자락을 평평하게 고르고 담장을 쌓는 등 보수를 잘하여 보존 상태가 좋아서 파손된 곳이 없고 비문의 상태도 완전하여 모든 글자를 판독하여 읽을 수 있다. 2008년 현재 경충단 제단비는 경충단과 함께 강릉최씨 23세손인 최기동이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최시창과 최면 부자는 세조의 즉위로 정국이 살얼음을 밟는 것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도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사육신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최시창과 최면 부자의 충절은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