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E03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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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 |
집필자 | 신상구 |
두천리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자연부락 장평에서 2001년 마지막까지 거주했던 여옥란은 봉화 석포 솔성골에서 태어났다. 십이령 고개길의 일부로써 선질꾼들을 위한 주막들이 성행했던 이곳에는 하나 둘 사람들이 떠나고 여옥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19살 시집와서 2001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생활했던 여옥란에게 장평은 잊히지 않는 기억과 추억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봉화 석포 솔성골에서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는 여옥란은 위로 오빠와 언니 그리고 아래로 여동생 네 명과 남동생 둘이 있었다. 부모님의 성함을 물어보니 2008년 79세 그녀의 기억에 부모님의 기억도 가물가물해진다. 여옥란이 태어난 봉화 소천면 석포는 한때 울진군의 유일한 기차역으로 이름난 승부역이 자리한 곳이었다. 가난한 농사꾼의 딸로 태어난 여옥란은 딸린 식구가 많아 학교에는 그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생활을 하였다. 그래도 동네마다 있었던 야학에서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는 배움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 야학도 3일만 다니고 끝났다. 집안 형편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여자인 그녀가 학교를 가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고, 무슨 일을 해서라도 집안을 도와야 하는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19살 외할아버지가 중매해준 남편을 따라 십이령 고개길을 넘어 북면 두천리 장평으로 시집왔다. 외할아버지는 소광리 새터 큰빛내마을에 거주하였는데, 외할아버지가 어떤 인연으로 남편을 알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중신 역할을 통해서 남편 박봉한을 만났다. 고향 석포를 떠나 산도 넘고 물도 건너고 그렇게 걸어서 북면 두천리 장평으로 왔다. 방앗골, 삿갓재, 큰빛내, 중미골, 중미재, 반재, 구두들, 선드락재를 지나니 시댁 장평에 도착했었는데, 그래도 그때는 이곳에 다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당시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폐가들만 있는 이곳에도 이전에는 사람들이 살아 선질꾼들이 지나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고 한다. 선질꾼이 걸었던 그 길을 여옥란은 시집오기 위해서 하루를 꼬박 걸어서 장평에 도착하였다. 시집 온 시댁은 시부모님을 비롯하여 그 아래로 6남매가 딸려 있는 대가족 집안이었다. 6살 많은 25살의 남편과 위로 맏시누이와 시숙이 있었고, 밑으로 시누이 둘과 시아주버니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렇게 몇 년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모두 시집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