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17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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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伯孫遺墟碑 |
영어의미역 | Memorial Stone for Jang Baekson |
이칭/별칭 | 경흥부사공 장백손 유허비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인표 |
성격 | 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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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967년 10월 |
관련인물 | 장백손 |
재질 | 화강암 |
높이 | 200㎝ |
너비 | 55㎝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
소유자 | 울진장씨 대종회 |
[정의]
1967년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에 건립된 장백손을 기념하는 유허비.
[개설]
장백손(張伯孫)은 조선 전기 세종 때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매정동마을에서 태어나 1471년(성종 2)에 사마시에 합격 하였고, 1487년(성종 18)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장백손은 갑산진 병마사 밑에서 만호 벼슬을 하면서 여진족 우적합이 조산보를 점령하였다가 도원수 허종에게 쫓겨 달아나자 허종을 도와 두만강을 건너 700리를 쳐들어가 여진족을 쳐부수니, 우적합은 다시 일어날 힘을 잃고 멀리 달아났다.
이 소식을 들은 성종이 크게 잔치를 베풀어 위로와 격려를 하고 한 계급을 승진시켰다. 또한, 1495년(연산군 1)에 삼수를 지겼고, 1501년(연산군 7)에 용양위, 1504년(연산군 10)에 강계부사가 되었다가, 중종 때는 순천부사, 원주부사, 경흥부사 등을 역임하고 나서, 1523년(중종 18)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건립경위]
장백손 유허비는 장백손의 흔적을 표시한 것이 없어 후손인 장헌규, 장인환, 장영철 등이 실기(實記)를 바탕으로 남진영(南軫永)이 지은 비문을 새겨, 최중희(崔中熙)가 글을 써서 1967년 10월에 세웠다.
[위치]
장백손 유허비는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매정마을과 죽변항을 연결하는 도로 남쪽 개천변 용호언덕 소나무 숲 속에 있다. 울진읍에서 국도 7호선을 타고 북면 방향으로 가다가 후정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나온 후 200m를 간 후, 후정리 방향으로 1㎞ 정도를 가면 된다.
[형태]
장백손 유허비는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은 비각 안에 있다. 돌담을 두른 비각은 북쪽은 살대로 막고, 나머지 벽들은 나무판자로 마감하였으며, 입구 처마 아래 유허각(遺墟閣) 현판이 있다. 비석은 화강암으로 제작하였으며, 비좌와 지붕돌[옥개형 가첨], 비신으로 제작하였다. 비석의 규모는 지붕돌이 가로 94㎝, 세로 61㎝, 높이 50㎝이며, 비신이 높이 145㎝, 너비 55㎝, 두께 25㎝이다. 비좌는 가로 80㎝, 세로 55㎝, 높이 5㎝로 비석의 총 높이는 200㎝이다.
[금석문]
비신의 앞면에는 세로로 “경흥부사울진장공백손유허비(慶興府使蔚珍張公伯孫遺墟碑)”라 새겼는데, 글자크기는 가로 13㎝, 세로 15㎝이다. 옆면과 뒷면에는 세로로 장백손의 행적을 적은 비문과, 글쓴이, 비석의 건립 연대를 새겼는데 글자 크기는 가로 2㎝, 세로 2㎝이다. 장백손 유허비에 옆면과 뒷면에 쓰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울진군 북으로부터 20리 떨어진 매정공리(梅亭孔里)의 한 구역은 옛날 장씨(張氏)가 살던 곳이다. 떠 솟는 바닷가의 언덕바지가 기이(奇異)함을 드러내 웅걸함을 나타내어 인물을 낳았으니 자못 탁월(卓越)하였다. 부사(府使) 장공(張公)은 여기서 대대로 살아 지극히 가명(家名)을 떨쳐서 우뚝히 동쪽 고을 사람들의 선망(羨望)의 대상이 되었다. 을사년(乙巳年)에 나쁜 신하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뒤로는 동해의 한스러운 물결이 날마다 부사가 살던 매정마을에 몰려 곡식을 가꾸던 전장(田庄)과 병사(兵史)를 판독하던 등잔은 영영 잊혀지려고 하기에 자손과 뜻있는 분들의 끝없는 한을 드러냈다. 하루는 부사공의 종손(宗孫) 헌규(憲奎) 후손 인환(仁煥) 영철(永喆)이 마침 남곡(南谷) 영전(永銓)이 지은 실기(實記)를 진영(軫永)[나]에게 유허비명(遺墟碑銘)을 짓도록 책임지우니 진(軫)은 늙고 무식하며 또 글짓는 재주는 더욱 보잘 것 없어 사양했으나 어쩔 수 없어 행장(行狀)을 살펴 글을 짓는다. 공은 나면서 똑똑하여 씩씩한 약관(弱冠)의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니 때는 성종(成宗) 신묘년(1471: 성종 7년)이다. 공은 스스로 지금은 조정(朝廷)과 지방이 분발하고 백공(百工)이 노력하여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세워야 할 터인데 스스로 구차하게 주어대며 자신만을 위한 녹리(祿吏)의 계책으로 산다면 이것은 나라의 수치라고 생각하였다. 존경하는 벗 허상국(許相國)에게 찾아가서 겉으로는 무(武)를 안으로는 문(文)을 닦아서 공자의 장(張)-이(弛)의 상황에 대처하는 도리를 터득했기에 허상(許相)은 깊이 수긍했다. 정미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내금위(內禁衛)에 제수되고 경술년 갑산진병마만호(甲山鎭兵馬萬戶)가 되었다. 그때 북쪽 오랑캐가 침입해 들어왔는데 조정에서는 허공(許公)을 영안감사(永安監司)로 파견할 것을 의논하였다. 신해년에는 여진족(女眞族)이 쳐들어와서 변방을 지키는 장수를 살해했다. 임금은 허공에게 특명하여 [영안감사]겸 도원수(都元帥)로 유임(留任)하여 위엄을 떨칠 것을 명했다. 허공은 명을 받들어 병사들을 모아 공이 맡고 있는 병마로서 적을 정벌하기 10개월 만에 적은 강을 건너 도망하여서 공이 이끄는 병사는 승리를 했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위안을 하며 은혜가 백성에게까지 미쳤다 하고 공 또한 한 계급을 올랐다. 연산군(燕山君) 을묘에 전보하여 삼수(三水)를 지켰으며 겨울에 귀향하여 경신년을 지나는 동안 용양위(龍驤衛)로서 남북 두 곳을 두루 들어갔다. 아! 무신년의 사화(士禍)로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났을 때 조정대신들이 의리(義理)에 투철하지 못하여 벼슬을 그만둘까 망설일 때 공은 갑자년에 외직(外職)으로 강계(江界)를 지켰고 중종(中宗)이 왕위에 오른 기사년에는 경흥창수(慶興倉守)가 되었고 그 뒤 순천(順天) 원주(原州) 경흥(慶興) 등을 역임했으니 이는 날이 밝으면 길을 가고 지면 날 개이기를 기다리는 태도가 아닌가. 전후 열 번을 임금을 경호(警護)하기에 소홀함이 없었고 여덟 번 고을을 지켜 치적(治績)이 많았다. 계미년에 나이 많아 벼슬을 그만 두었다. 무자년에는 본읍(本邑)의 고산성(古山城)이 기울고 물이 없어 적을 막기 어려워 읍소(邑所)를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상소(上訴)하였다. 신묘년에는 나이 많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아! 임금이 신하 대우를 잘하고 재상(宰相)이 훌륭히 정사를 하던때 남긴 글이 있을텐데도 지금 알아볼 길이 없으나 뒷날 역사를 보는 사람들은 글자에 담긴 뜻을 가만히 살필 수 있을 것이리라. 명(銘)을 짓는다. 나라를 다스림은 변방을 잘 지키는 일. 당(唐)나라가 회(淮)와 채(蔡)를 평정했고, 한(漢)나라가 교지(交趾)와 안남(安南)을 정복했다. 백성의 안녕은 이 한 일에 드러나노니. 그 옛날 성종대왕(成宗大王) 때 북방 오랑캐가 시끄러워 임금께선 허공(許公)에 명령하여 도원수(都元帥)를 삼으시고 공께서는 영특한 용맹으로 허공에게 발탁되어 충성은 나라를 보위(保衛)했고 결심은 전장터에서 죽기였네. 지휘력이 탁월하여 오랑캐를 무찌름에 위세가 떨칠 때마다 서리발이 내렸지. 또 다시 은혜가 내려 따사로운 봄을 맞았네. 군사(軍士)가 개선함에 임금은 기뻐기뻐 열 번이나 임금님 경호 여덟 번 성(城)을 지켜 역사가 있는 한 그 공은 빛나리라. 아! 매정 골짜기 공께서 서식(棲息)하던 곳 어려운 세월만나 한스러움이 많았지. 서로서로 감동되긴 그 옛날과 같아서 새로 이 돌을 세우노니 영원무궁하리라. 경술후(庚戌後) 58년 정미 소춘절(小春節) 영양(英陽) 남진영(南軫永) 근찬(謹撰)”
[현황]
장백손 유허비 비각과 제단 주변이 농경지로 개간되어 있으나, 도로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 평소에는 사람들의 접근이 그리 많지 않고, 울진장씨 대종회에서 관리하여 잘 보존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장백손은 울진을 본관 지로 하는 울진장씨 선대 조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 후손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장백손 유허비는 인물에 대한 사료가 그리 많지 않은 조선 전기의 상황에 대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