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6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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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蔚珍·三陟地區 武裝共匪 浸透 事件 |
영어의미역 | The Armament Red Guerrillas Infiltration Event in Uljin and Samcheok Reg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희흥 |
[정의]
1968년 11월 2일 북한 유격대가 울진군과 삼척시로 침투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68년 전후 미국은 베트민에 대한 폭격을 중지하는 동시에 파리평화협정을 진전시킴으로써 베트남 전쟁을 마무리해 가고 있었다. 동서 대결의 분위기가 완화되어 가던 추세 속에서 북한은 중공과 소련의 군사 원조를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긴장 상태를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자 했다.
[목적]
1968년 일어난 1·21사태의 실패를 만회하고, 남한에서 반정부 민중 봉기를 일으킬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침투하였다.
[발단]
1968년 11월 2일 밤 북한 유격대가 남한에 활동 거점을 구축하기 위하여 울진과 삼척으로 침투하였다. 이 무장 유격대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예하의 124군 소속으로, 같은 해 1월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남파되었던 무장공비들과 같은 부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후에 생포된 무장공비의 증언에 따르면, 일당은 1968년 7월부터 3개월간 유격 훈련을 받고 10월 30일 오후 원산에서 배로 출발하여 그날로 울진 해안에 도착하였다. 되돌아갈 때에는 무전 지시를 받기로 하였으나 실패하여 독자적으로 육상 복귀를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경과]
1968년 10월 30일에서 11월 2일에 이르는 사흘 사이에 120명의 북한 유격대는 8개조로 나누어 야음을 타고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고포 해안에 상륙하여 울진·삼척·봉화·명주·정선 등지로 침투하였다.
군복·신사복·노동복 등 갖가지 옷차림에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지닌 무장공비들은 주민들을 집합시킨 다음 북한 책자를 나누어 주면서 북한의 발전상을 선전하는 한편, 정치 사상 교육을 실시하여 인민유격대에 가입할 것을 강요하였다.
울진군 북면 고숫골의 경우, 11월 3일 새벽 5시 30분쯤 7명의 공비가 나타나 “경북경찰대에서 주민등록증 사진을 찍어 주러 왔다”라고 하면서 주민을 모은 다음에 사진을 찍고 위조지폐를 나누어 주고는 사상 선전을 한 다음 유격대 지원 청원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무장공비들은 당시 이 마을에 와 있던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에 사는 전병두를 대검으로 찔러 죽였으며,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도록 위협하였다.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에 당국은 11월 3일 오후 2시 30분을 기하여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 ‘을종 사태’를 선포하였고, 작전상 필요에 의해 4일 정오를 기해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 ‘갑종 사태’를 선포하였다. 한국군은 대간첩 대책본부를 세우고 군(軍)과 향토예비군을 동원하여 소탕 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결과]
대간첩 대책본부의 지휘 아래 군과 향토 예비군을 출동시켜 산악 지대의 험준한 지형과 나쁜 기상 조건에도 불구하고 무장공비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망을 형성하여 소탕 작전을 벌였다. 11월 30일까지 기관단총 56정, 권총 8정, 실탄 1만 8000발, TNT 17개, 수류탄 163발, 카메라 3대 등을 노획하였다. 12월 말까지 58일의 작전 기간 동안 무장공비 120명 중 111명을 사살하고 5명을 생포하였으며, 2명은 자수, 2명은 도주하였다.
우리측의 피해도 커서, 11월 29일 대간첩 대책 본부의 발표에 의하면 군경 27명, 예비군 6명이 전사하였고 무장공비에게 살해된 민간인 16명을 포함하여 모두 49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37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북한의 대남 교란 행위는 한국 국민의 반공 태세를 한층 공고히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은 이 사건이 한반도의 긴장을 초래하고 유엔의 평화통일 노력을 방해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유엔총회에 특별 보고를 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