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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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朱皞 |
영어음역 | Ju H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장희흥 |
[정의]
조선 중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신안(新安). 아버지는 교수공(敎授公) 주세창(朱世昌)이다. 부인은 울진장씨이다.
[활동사항]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에 있는 안일왕성으로 피신했으나 일가친척이 왜병들에게 무참히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분연히 일어났다. 또한 “고을 백성들이 하루 이틀도 아닌 수많은 날을 왜인들의 손에 살인과 방화, 약탈을 당하는데 보고만 있겠는가? 피 끓는 젊은이로서 내 한 몸 보존하기 위하여 대의를 저버리고 있단 말인가?” 하고 외치며 안일왕성을 박차고 나와 울진읍 고성리 고산성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성벽을 수축하고 맹훈련을 시키며 고읍성(古邑城)을 지켰다.
이듬해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少西行長]의 부대가 울산과 강릉, 동해안에 각각 상륙하여 남북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김언륜(金彦倫) 장군이 남하군(南下軍)을 막다가 북면 마분동 분투곡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8월 말에 북상군(北上軍) 수천 명이 ‘남무묘법연화경’이라는 주문을 쓴 깃발을 앞세우고 쳐들어왔다. 왜군이 고읍성에 침입하자 주호가 이끄는 의병들은 10여 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맞서 싸웠으나 식량과 식수가 떨어지고 무기마저 못쓰게 되어 주호를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주호의 처 장씨가 주호의 죽음을 확인하려다가 비통한 심정을 금할 길 없어 왜적에게 반항할 때 적이 장씨의 미모를 탐내어 손으로 가슴을 잡으니 패도(佩刀)로 양쪽 가슴을 잘라 땅에 던지고 자결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이들 부부의 일이 조정에 알려져 1603년(선조 36) 예조에서 주호에게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의 벼슬을 내리고, 부인 장씨에게는 영인(令人)의 벼슬과 함께 열녀문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