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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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湛 |
영어음역 | Jeong Dam |
이칭/별칭 | 언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인식 |
성격 | 무신|의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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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
성별 | 남 |
몰년 | 1592년(선조 25) |
본관 | 영덕 |
대표관직 | 김제군수(金堤郡守) |
[정의]
조선 중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영덕(盈德). 자는 언결(彦潔). 아버지는 정창국(鄭昌國)이다.
[활동사항]
정담은 1575년(선조 8)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니탕개(尼湯介)의 변(變)에 공을 세웠다. 1592년(선조 25) 김제군수(金堤郡守) 재직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집하여 권율(權慄)의 지휘 하에 나주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 해남현감(海南縣監) 변응정(邊應井), 의병장 황박(黃樸) 등과 함께 웅치(熊峙) 방어에 나서 금산을 거쳐 전주를 점령하려는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 휘하의 일본군을 7월 7일과 8일 양일에 걸쳐 백병전을 벌이면서 끝까지 방어하였으나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영해(寧海)[현 경상북도 영덕군의 고려와 조선시대 명칭]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웅치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이 그 충절에 경의를 표시하여 ‘조조선국충의간담(弔朝鮮國忠義肝膽)’이라는 묘비를 세웠으며, 1690년(숙종 16)에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후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