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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558
한자 金彦倫
영어음역 Gim Eonryu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고목리 지장골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최인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장
출신지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고목리 지장골
성별
생년 1565년연표보기
몰년 1593년연표보기
본관 월성(月城)

[정의]

조선 중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의병장.

[활동사항]

지장서재에서 학문을 닦는 한편 병서를 탐독하고 무예를 익혔다. 20세 때부터는 쇠도리깨 쓰는 법과 말 타는 법을 연습하여 인근 가치산(迦治山) 정상을 뛰어 오르내리는 것이 비호와 같았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 중의 일부는 울산을 거쳐 육로로 북상하고, 또 다른 부대는 강릉에 상륙하여 일부는 북상하고 일부는 남쪽으로 내려와 연결을 꾀하였다. 울진이 그 중심에 있어 전쟁의 피해가 매우 심해지자 8월 김언륜은 의병을 모아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덕천리 앞[현재의 내평들로 당시는 해유호지(海溜湖池)]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을 방어하였다.

김언륜은 야간에는 가치산에 등을 밝혀 우리 군사가 많아 보이게 위장하고, 장유대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왜군을 섬멸하여 왜군의 연결을 차단한 후 급습하는 전략을 세웠다. 북상하던 왜군 선발대가 고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한 지 10일이 지나면서 아군은 식량이 떨어지고 우물의 물이 마르며 무기가 열세하여 북문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왜군의 공격으로 성 안에 있던 관군은 모두 전사하고, 그들이 흘린 피가 계곡으로 흘렀다.

김언륜은 남쪽으로 내려오는 왜군을 맞아 벌이포(伐夷浦)로 몰아넣은 후 쇠도리깨로 공격하여 많은 왜병을 죽였다. 이를 본 병사들이 용기를 내어 역전고투한 지 3일 만에 왜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그러나 왜군들이 고산성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덕천리로 진격하고, 또한 후속 부대가 도착하여 공격에 가담하였다.

김언륜은 뛰어난 활 솜씨로 왜의 전초병을 쏘아 죽이는 등 생명을 돌보지 않고 싸웠으나, 무기가 부족하고 원병이 전혀 없어 전투가 시작된 지 여러 날 만에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전사한 군졸과 병마는 덕천 해안에 매장하였다. 마분(馬墳)이라는 마을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덕천리 장유대에 있다. 김언륜의 묘소는 원래 마분동 입구 분투골[奮鬪谷]에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과 월성김씨 문중에서 관리해 오다 일제강점기 때 도로를 개설하면서 이장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과 김씨 문중에서 본래 묘소 모퉁이에 비밀리에 이장하여 어린아이 무덤처럼 만들어서 지켜 왔다. 이때 ‘김공언륜지묘’가 새겨진 묘지석과 투구, 긴 칼이 발견되었는데 일본인이 빼앗아 갔다.

1976년 11월 18일 경상북도 울진교육청 임두한(林斗漢) 교육장이 초등학교 교장 윤병한(尹炳漢)으로부터 김언륜의 행적을 듣고 애석하게 여겨 관내 교직원들의 성금 35만 원으로 부근 장유대로 묘를 이장하였고, 12월 1일에 비석을 세웠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이 끝난 후 김언륜의 공적을 여러 차례 상소하였으나 포상을 받지 못하였고,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송정동에 거주하던 생원 백시승(白始升)의 유고에 “김언륜 장군은 임진왜란 때 울진 전투에서 쇠도리깨로 적을 사로잡아 전공이 컸으나 상을 받지 못했다”라는 기록과 구전(口傳)이 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석암(石巖) 전열(田烈)이 『울진군지』에 김언륜의 행적을 기재하려 하였으나 일본인의 반대 때문에 “김 장군이 항상 고목리 가치산 장유대에서 놀았다”라고만 기록하였다. 1997년 12월 31일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청년회에서 장군의 유지(遺志)를 받들기 위하여 울진군에서 4000만 원을 지원받아 묘역을 단장하여 성역화하고 후세 교육의 표본으로 삼고자 비석을 세웠다.

[참고문헌]
  • 『울진군지』(울진군지편찬위원회, 2001)
  • 울진신문(http://www.ulj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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