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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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達里胎室址 |
영어의미역 | Placenta Chamber Site in Samdal-ri |
이칭/별칭 | 신래태실,신래태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삼달리 산66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심현용 |
성격 | 태실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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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1487년(성종 18) 4월 7일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삼달리 산66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삼달리에 있는 조선 전기 태실 터.
[개설]
태실이란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나면 의식과 절차를 거쳐 태(胎)를 묻은 시설을 말한다. 즉, 태(胎)는 태어난 아기의 생명선이며 근원이라 하여 예로부터 소중하게 다루었는데, 특히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그 태를 전국의 길지(吉地)를 골라 태실을 만들고 묻었다.
태실은 아기태실(阿只胎室)과 가봉태실(加封胎室)로 구분되는데, 아기태실은 최초로 설치한 태실을 말한다. 아기태실의 주인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아기태실에 추가로 지상 가운데에 부도(浮屠)와 비슷한 석물을 치장한 후 팔각난간석(八角欄干石)을 돌리고 그 옆에 귀부가 있는 화려한 태실비를 세운 후에 가봉을 하는데 이것을 가봉태실이라 한다.
태를 봉안하는 제도가 시작된 시기는 문헌 기록상으로 신라시대 김유신의 태실부터로 확인된다. 이로 보아 늦어도 신라시대부터는 태를 봉안하는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실 장태(藏胎)의 풍속은 『고려사(高麗史)』, 『죽계별곡(竹溪別曲)』 등 고려시대 문헌 기록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왕실에서의 태실 제도는 고려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왕실 장태 의식은 중국에서도 보이지 않는 우리 고유의 풍속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태를 땅에 묻는 풍속이 있는데, 당(唐)나라부터 확인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장태 풍속은 김유신의 태실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중국보다는 앞선다. 또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을 보면 “태경지설(胎經之說)은 신라와 고려조간에 시작된 것으로 중국 옛날 제도가 아니다.”라고 명시하여, 우리나라의 장태 제도가 고유의 풍속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태실은 거의 조선시대 왕실의 태실로 대부분 한강 이남 지역인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집중되어 있지만, 성종 이후부터는 경기도와 강원도에도 태실의 조성이 있었고 예외적으로 황해도 지역에도 설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태봉(胎峰)의 조건은 무덤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의 명당 조건과는 달리 들판[野中]의 둥근 봉우리[圓峰]을 택해서 산 정상에 내맥(來脈)이 없고 용과 호랑이[龍虎]를 마주 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국속(國俗)으로 되어 있었다. 태실이 조성되는 태봉은 명당 조건에 따라 3등분으로 구분되는데, 1등급에는 왕의 태실, 2등급에는 대군과 공주의 태실, 3등급에는 왕자와 옹주의 태실로 나누었으며, 금표 구역 역시 태실을 중심으로 왕은 300보[540m], 대군과 공주는 200보[360m], 왕자와 옹주는 100보[180m]로 규정하였다.
[위치]
평해읍 평해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온정면 방향으로 국도 88호선을 따라 약 2.8㎞ 가면 삼달2리 마을의 베릿재 또는 비리재라는 고개가 있다. 베릿재의 좌측 하천변에 삼달리 태실지가 있다. 삼달리 태실지는 북서쪽의 주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끝자락에 돌출되어 삿갓처럼 솟아오른 봉우리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삼달리 태실지 태함은 화강암을 잘 치석하여 만들었으며, 기석[몸돌]과 개석[뚜껑돌]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석은 평면 원형의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원통형으로 높이가 89.5㎝이며 지름이 94㎝이다.
기석 내부에는 평면 원형인 위가 지름 47㎝로 넓고, 아래가 지름 42.6㎝로 좁은 원통형 구멍을 깊이 58.5㎝로 팠으며, 바닥 중앙에는 지름 14㎝의 작은 원형구멍이 뚫려 있다. 개석은 평면 원형의 반구형으로 높이가 67㎝이며 지름이 96㎝이다. 내면에는 평면 원형으로 윗지름이 37㎝, 아래 지름이 47㎝, 깊이가 12㎝인 얕은 홈을 팠으며, 상면은 계란처럼 볼록하게 다듬었다.
태항아리[胎壺]는 외호(外壺)로써 항아리와 뚜껑으로 구성된 백자 항아리이다. 태지석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었으며, 가로 15㎝에 세로 20.5㎝, 두께 3.6㎝로 “황명성화이십이년십이월초육일해시생왕자견석태성화이십삼년사월초칠일오시장(皇明成化二十二年十二月初六日亥時生王子堅石胎成化二十三年四月初七日午時藏)”이라고 앞쪽에 명문이 새겨 있다.
태지석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태실의 주인은 1486년(성종 17) 12월 6일 오후 9~11시 사이에 태어난 왕자 이견석으로, 장태는 다음해인 1487년(성종 18) 4월 7일 오전 11~오후 1시 사이에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현황]
삼달리 태실지가 있는 산봉우리의 정상부는 긴 타원형 평탄대지로 되어 있는데, 그 중앙에 태함(胎函)이 기석(器石)과 개석(蓋石)이 분리된 채 방치되어 있다. 이 태함 안에 봉안되었던 태항아리[外壺]와 태지석은 현재 영남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태항아리와 같이 있던 조선통보 엽전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삼달리 태실에서 태함과 태지석 및 동전 등의 유물이 조사되어 조선시대 태실의 유물 연구에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를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