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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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露日戰爭 |
영어의미역 | Russo-Japanese War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장희흥 |
[정의]
1905년 러일전쟁 중 울진의 고포 앞바다에서 일어난 러시아 군함과 일본 군함의 전투.
[역사적 배경]
조선 지배를 선점하려던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일시 저지되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명성황후 민씨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단발령을 내리지만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함으로써 친러 정권이 수립된다. 그 결과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이권 확보가 충돌하면서 1904년 2월 4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러일전쟁 당시 울진 앞바다는 전장(戰場)이 되었는데, 1905년 5월 28일에는 울진 고포(姑浦) 앞바다에서 일본 군함 2척과 러시아 군함 1척이 싸웠다. 그 싸움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하고, 파도에 밀려온 수뢰포 하나를 서로 가지려고 싸우다가 폭발하는 바람에 35명이나 사망하였다. 이후 일본군이 울진 지역에 주둔하게 되었다.
[경과]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10여 명이 근남면, 근북면 바닷가에 깃발을 세우고는 이를 뽑아버리면 엄한 형벌로 다스리겠다고 하면서, “이 땅이 우리 땅이니 너희들이 관여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심지어 근북면 죽변의 망루에 머물던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일본 상인이 나타나 이를 매득하였다고 차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의 어업 침탈이 횡행하였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반도 연해의 모든 어장으로 침탈이 확대되었으며, 통감부정치가 시작된 후로는 통감부 관리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어민들의 단체 이주를 장려함으로써 1910년 이전에 이미 약 5,000여 명의 일본 어민들이 이주해왔다.
이에 따라 피해를 입게 된 조선 어민들 사이에 분쟁이 자주 발생하였다. 1904년 4월 21일 경상북도 영덕군 남면 원척리 어민 김갑중이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던 중 일본 어선을 만나 어물(漁物)을 빼앗기고 상해를 당하였다. 그 다음날 일본 어선 3척이 본진(本津)에 들어오자 두민(頭民) 최경칠, 박성근, 우명구 등이 이들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무장한 일본인들로부터 큰 피해를 입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과]
이런 과정에서 형성된 반일의식은 바로 의병항쟁으로 연결되었다. 이 시기 울진 지역의 의병 활동은 앞서 영해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신돌석 부대와 관련되면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