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온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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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광명시의 전신인 시흥군의 도로·철도 등의 기반 시설을 표시한 약도. 재질은 한지이며, 도면 크기는 가로 79.7㎝, 세로 52.4㎝이다. 전체적으로 도로와 철도 그리고 수계가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는 점이 주요 특징이다. 부군계(府郡界), 국도(國道), 면계(面界), 삼등 도로(三等道路), 도로, 하천, 철도, 정거장, 군청, 동리(洞里), 면사무소, 우편국,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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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경기도 광명 지역의 옛 군현 읍지인 『시흥읍지(始興邑誌)』를 포함해 경기도의 35개 군의 읍지를 묶은 통지(統誌). 『경기읍지(京畿邑誌)』는 총 6책으로 구성된 필사본이다. 판심은 상이엽화문어미(上二葉花紋魚尾)이며, 판식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이고, 반광(半匡)은 22.4×15.3cm이며, 계선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읍지의 크기는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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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기타야마 와카니치[北山若二]가 시흥군 서면[현 광명시] 8개 리의 역사와 문화 등을 조사하여 간행한 향토지. 『서면향토지(西面鄕土誌)』는 시흥군 최초의 초등학교인 서면공립보통학교[현 서면초등학교] 교장 기타야마 와카니치[北山若二]가 당시 시흥군 서면의 소하리, 하안리, 철산리, 광명리, 노온사리, 가학리, 박달리, 일직리 등 8개 이(里)의 향토사를 조사하여 발간한 향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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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경기도 광명 지역에 실시한 대규모 임야조사사업. 임야조사사업은 일제가 한반도 내에서 식민지 경제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일환으로 전국 임야의 소유권을 재확정하고자 추진한 사업으로, 1916년 시험적인 준비 조사를 거쳐 1917년부터 1924년까지 조사와 측량 등을 마쳤다. 이에 부수하는 심의 처리 등의 사무는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주관으로 1919년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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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마친 후에 만든 광명 지역의 토지조사부.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는 1910년 3월 15일 칙령 제23호에 따라 1910년 8월 24일 법률 제7호로 「토지 조사법」을 공포했다. 이후 1912년 8월 13일 조선총독부제령 제2호로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면서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었고, 위 법령에 의거하여 전국적으로 ‘토지조사부’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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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리 사람들 이야기는 광명시 개청의 모태가 된 광명동 지역과 관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었다. 광명리의 도시개발과 그에 따른 변화는 이후 전개되는 광명의 여러 지역의 도시화의 기본 모델이기 때문이다. 광명시의 도시화는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한 자연마을이 조금씩 확대되면서 서서히 진행된 것이 아니다. 서울특별시의 주택과 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서울특별시의 택지개발계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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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기도 중서부에 있는 시. 광명시는 한반도 중부에 있는 기초자치단체로 경기도 중서부에 자리한다. 북쪽은 서울특별시 구로구 개봉동과 천왕동, 구로동, 동쪽으로는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동과 시흥동, 남동쪽과 남서쪽은 경기도 안양시, 시흥시와 접한다. 광명시의 동단인 소하1동과 서단인 옥길동 사이 거리는 6.55㎞, 북단인 철산1동과 남단인 가학동 사이 거리는 10.3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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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시흥군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 운동은 경부선과 경의선 두 철도 건설 과정에서 촉발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이미 1901년 경부선 철도 공사가 시작된 이래 역부의 저렴한 임금과 철도 부지의 무상 수용에 저항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1901년 9월 7일자 『황성신문』에는 경부선 철도의 기공식 이후 시흥 등 지역에서 철도 건설에 동원된 역부(役夫)들이 적은 임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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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있는 조선 후기 사찰 터. 노온사 터는 노온사동(老溫寺洞)에 있던 절터로 마을의 명칭은 노온사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마을의 이름은 원노온사동, 노온절, 노온절리, 노온사리, 논사리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며 모두 사찰명과 유래하여 불리고 있다. 노온사동은 원래 큰말마을, 대말마을이 현재 마을에서 서남쪽 7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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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시 소하동과 노온사동 경계에 있는 구름산 서쪽에서 발원하여 목감천으로 흐르는 온신천의 지천. 노온사동의 논사리[원노온사동·노온절·노온절리·노온사리·큰말]는 동·남·북쪽이 산으로 에워싸여 있고, 서쪽이 트인 마을이다. 논사리는 본래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마을이 전소되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마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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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 지역에서 3·1만세 운동이 처음 일어난 시기는 3월 27일이다. 당시 서면 소하리에 거주하고 있던 이정석(李貞石)이 노온사리 주재소 부근에서 만세 시위를 선동하다가 28일 아침 출동한 일본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치안법 위반자로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에 구금되었다. 이에 서면 지역 주민들이 이정석을 구출할 계획을 세움으로써 이 지역에서 3월 28일 200여 명이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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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금천현·시흥현·시흥군에 있던 행정구역. 서면은 현재의 경기도 광명시 전역에 해당하던 지역이다. 1914년 남면과 통합하기 이전에는 경기도 광명시의 법정동인 철산동·소하동·하안동·일직동 지역에 해당하고, 남면과 통합한 이후에는 경기도 광명시의 법정동인 광명동·가학동·노온사동을 포함한 지역이다. 조선시대에 금천현(衿川縣) 서쪽에 있었으므로 서면이라고 하였다. 서면은 고려시대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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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부터 1979년 이전까지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지역에 있던 면사무소. 현 광명시 소하2동은 1979년 이전까지 경기도 시흥군 서면이라는 행정 구역이었는데, 서면사무소는 서면 지역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 기관이었다. 서면사무소가 생기면서 이 지역에는 취락이 발달하였고,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1927년에는 근대적인 의미에서 광명시의 첫 교육 기관인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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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2월 서면공립보통학교 교장 기타야마 와카니치(北山若二)와 교사 성만용(成萬鏞)이 편찬한 『서면향토지』를 통해 읽혀지는 설월리는, 서면의 면소재지임에도 상가나 유흥 시설, 금융 기관, 병원 등의 시설들이 거의 없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여타 지역의 면소재지와 비교해 보면 사뭇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서면향토지』는 1927년 서면공립보통학교의 초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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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기도 광명시의 역사. 2010년 현재까지 광명 지역에서는 구석기 및 신석기시대의 유적지가 조사, 보고된 적이 없다. 그러나 목감천 등 하천 주변에 평야 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광명시의 지형적 특성으로 미루어 향후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은 적지 않다. 광명 지역에 사람들이 정착한 것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철산동 고인묘와 가학동 지석묘 등을 통해 확인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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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광명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의병(尹宜炳)[1900~1960]은 시흥군 서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때 최호천(崔浩天)과 함께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서울에서 만세 시위가 격렬하여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에 돌아와 청년들과 독립 운동을 계획하여 이끌었다. 그리하여 소하리와 가리대리의 주민 200여 명을 지휘하며 1919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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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시에 분포하고 있는 인문지리적 요소. 광명시는 경기도의 남서부 중앙에 자리하여 북쪽과 북동쪽은 서울특별시 구로구와 금천구 시흥동, 남동쪽과 남서쪽은 경기도 안양시, 시흥시와 경계를 이룬다. 광명시는 광주산맥 끝자락인 수리산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가학산(駕鶴山)[220.2m], 서독산(書讀山)[180m], 구름산(雲山)[230m], 도덕산(道德山)[183.1m]으로 이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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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경기도 광명 지역의 역사.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 동안 광명 지역은 시흥군 서면과 남면으로 편제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를 겪지 않으면서 현 광명시의 전신으로서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광명 지역에서도 일제의 가혹한 수탈과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 항일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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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시 가학동에 있는 자연마을. 광명시에서 가장 먼저 장(場)이 열린 마을이어서 장터말이라 하였다. 장터말은 파주염씨가 처음 정착하여 세거하면서 집성촌을 이룬 마을로, 조선 말기에는 시흥군 남면 장기리였고, 1914년 시흥군 서면 가학리에 속하였다. 1964년 시흥군 서면 가학5리에 속하였고, 1981년 시제 실시로 광명시 가학동에 속하였다. 행정상으로는 광명시 학온동 9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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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광명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호천(崔浩天)[1899~1960]은 시흥군 서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 21세로 소하리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재학생으로 이곳에서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7일 같은 동네에 사는 이정석(李貞石) 등이 독립 만세 시위를 하다가 노온사리(老溫寺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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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일제가 한국의 토지 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경기도 광명 지역에서 실시한 경제 정책. 일제는 1910년 9월 오키나와와 대만에서 토지를 조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같은 해 9월 30일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관제(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官制)」를 공포하고 1912년 8월에는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였다. 일제는 전 근대적인 소유 관계 아래에 놓여 있는 토지 소유 관계를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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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시 가학동·노온사동을 관할하는 행정동. 가학동의 ‘학’자와 노온사동의 ‘온’자를 따서 학온동이라 하였다. 학온동은 고려시대 금천현(衿川縣)에 속했던 지역으로, 금천현은 조선 건국 후인 1414년(태종 14) 과천(果川)을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이 되었다가 두 달 뒤 과천을 다시 설치하면서 금천과 양천(陽川)을 병합해 금양현(衿陽縣)이 되었고, 1416년(태종 16)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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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광명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독립 운동. 1910년 일제의 강제에 의하여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 광복까지 끊임없는 항일운동이 전 민족적으로 펼쳐졌다. 광명지역에서도 항일운동은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주로 3·1운동과 야학 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은 광명 지역에서도 대단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27일, 소하리에 거주하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