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D01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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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모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은실 |
모산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헌과 구전을 통해 그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모산리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문헌은 『호구총수(戶口總數)』(1789년)이다. 여기에는 김해도호부 대산면에 속한 모산리(牟山里)를 확인할 수 있다. 이로 보아 모산마을은 조선 후기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전에서도 2백여 년 전에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최초로 입향하였다고 전해 온다.
강물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만당(마을에서는 가장 입지가 좋은 곳이라 여김)에서 김해김씨가 터를 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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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낙동강과 북모산마을
북모산마을 노인회장인 문학봉 옹은 김해김씨의 입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다. “김씨들이 먼저 들어왔을꺼만은. 그분들이 살림도 있고 돈도 있고 주당 만당에 가 있었거든. 좋은 입지는 저거(김해김씨)가 차지했으니끼네. 숫자도 많고 김해김씨다. 지금은 그 후손들이 별로 없어. 전부 다 나가 버리고 두 집, 셋집이 있는가보네. 형제지간에 오래 살았어.”
남모산마을에 살고 있는 김해김씨의 후손인 김점훈 씨에 따르면 8대조인 김시동이 입향하였다고 한다. 김시동은 김해시 진영읍 신룡리에서 세거하다가 모산마을로 이주하였으나 입향 동기에 대해서는 전해 오지 않는다. 이 후 진·박·문·최·이·고 씨 등의 여러 성씨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모산마을은 김해도호부 대산면에 속하여 조선 후기(1700년대 중반)에 만당 일대에 자리 잡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모산리는 1908년 칙령 제69호로 창원부에, 1910년에는 마산부에 편입된다. 그리고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는 모산동(牟山洞)으로 표기되어 등장한다.
모산동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갈전리 일부를 병합하여 모산리(牟山里)가 되었고, 다시 창원군 대산면에 편입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지도에 창원군 대산면에 편입된 모산리(牟山里)와 송등(松登)이 등장한다. 이 지도를 면밀히 보면 남모산마을 만당 일대에 집들이 산재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둑을 쌓게 되면서 낙동강과 인접한 북모산마을에도 많은 사람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34년 폭우가 쏟아지고 강물이 범람하면서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갑술년 물난리’라 불리는 이 폭우로 인해 마을뿐만 아니라 대산면 일대가 큰 피해를 입을 만큼, 대산면 최대의 홍수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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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동읍, 대산면 일대 수해로 인한 식량보급 장면
해방 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모산마을은 다행히도 큰 피해 없이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전쟁의 피난처였던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강물의 범람이 잠잠한가 싶더니 1963년, 1965년, 1969년, 1979년의 폭우로 인해 마을은 또다시 큰 재해를 입는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1970년대 중반까지 대부분이 초가집을 지어 살았다고 한다. 폭우로 집이 붕괴되면 양옥집보다는 초가집이 새로 짓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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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폭우로 인한 대산면 일대 침수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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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모산마을 초가집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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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모산마을 초가집
1970년대 후반 낙동강 제방이 정비되면서 마을에도 안정이 찾아왔다.
더 이상 홍수로부터 마을이 휩쓸러 가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면서 마을 곳곳에 길이 확장되거나 지붕개량 등을 통해 마을이 정비되어 갔다. 이와 함께 수박을 재배하는 농가들이 점차 급증하면서 1980년대 초반 마을 인구의 2/3 이상이 수박을 재배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때부터 모산마을은 창원수박 주산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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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제방과 모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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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산수박
[곳곳에 남아 있는 지명유래]
모산마을은 예부터 보리가 많았다고 하여 ‘보리뫼’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지금은 보리뫼라는 이름이 잊혀진 지 오래지만 말이다. 이렇듯 모산마을은 보리뫼를 뜻하는 ‘모(牟)’와 ‘산(山)’이 붙여진 한자말이다.
현재 모산마을은 북모산, 남모산, 송등 세 개의 자연마을을 아울러 말한다. 모산의 북쪽에 있는 자연마을은 북모산마을, 남쪽에 있는 자연마을은 남모산마을이라 부르는데, 두 마을 사이에는 신작로가 자리하고 있다.
모산마을의 남동쪽에 자리한 송등은 특이하게도 동모산이 아닌 송등(松登)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마을 가운데 소나무가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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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
북모산과 남모산마을에는 재미난 옛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북모산마을에는 진초깍단, 이성깍단이라는 마을이 있다. 진초깍단은 모산마을의 북서쪽에 자리한 마을을 말하며, 진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진초깍단(진초위라고도 부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이성깍단 은 모산마을 북동쪽에 자리한 마을을 말하며, 그 유래는 전해 오지 않는다.
북모산마을 노인회장 문학봉 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북모산은 지줌깍단이거든. 진초깍단, 이성깍단. 진촌은 진가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진초위 진촌이라 불렀어. 다른 성받이(성씨)는 별로 없어. 동네에서 부르기로 그렇게 불러. 지금은 진씨들도 없지만 지금도 우리는 진촌이라 해야 퍼득(금방) 알아. 진촌에 누구네 하면 퍼득 안다. 이성깍단은 떨어졌다고 해서 이성이라 했는지 몰라. 누구나 알기(듣기) 싶게 정했던 모양이야.”
남모산마을에는 만당, 비석골, 단지살이, 장터껄, 정지껄이라는 지명이 있다. 만당과 비석골은 신작로를 따라 (구)국도 25호선을 경계로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만당은 만등(萬登)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높은 언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만당에서 마을이 먼저 형성되었다고 전해 오며, 수령이 2백 년도 넘은 당산나무(당산할배)가 자리하고 있다.
비석골은 비석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비석골에는 1918년에 세워진 전교리밀성박공해철시혜불망비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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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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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리밀성박공해철시혜불망비
남모산마을에는 단지살이, 장터껄, 정지껄이 있다. 단지살이는 모산마을 남동쪽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현재 (주)초심공업이 자리하고 있다.
옛날 마을 사람 중에 옹기그릇을 팔아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장터껄은 단지살이에 자리하였다고 하며, 옛날 이곳에서 장터가 열렸다고 하여 장터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남모산 경로당이 자리하고 있다. 정지껄은 당산나무(당산할매)가 자리한 일대를 말한다. 정자나무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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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나무
[정보제공자]
문학봉(남, 1931년생, 북모산마을 거주, 북모산마을 노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