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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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原具氏 |
영어의미역 | Changwon Gu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집필자 | 박태성 |
세거|집성지 | 창원 구씨 세거지 -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송정리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내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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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세장지 | 의창군 구성길의 유허비 -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봉산리 |
성씨 시조 | 구성길 |
[정의]
구성길을 시조로 하는 경상남도 창원시 세거 성씨.
[연원]
구씨(具氏)는 원래 구씨(仇氏)로서 중국 송나라의 대부인 구목(仇牧)을 상조(上祖)로 한다. 구씨가 우리나라에 귀화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창원 구씨의 시조는 구성길(仇成吉)이다. 구성길은 고려 혜종(惠宗)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냈으며 945년(혜종 2) 서경에서 권신 왕규의 전횡을 토벌한 공으로 의창군(義昌君)에 봉해지고 가세를 일으켰으므로 후손들이 구성길을 시조로 모시고 본관을 의창으로 삼았다. 그 후 구성길 이후 4대와 공민왕(恭愍王) 때의 구설(仇雪)까지 약 400년 동안은 세계가 불분명하며 그 내력은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고려 말 구종길(具宗吉)의 부친인 구설을 일세조로 하며 조선 세종 때 홍문관 직제학을 지낸 구종길을 중시조로 한다. 본관은 시조가 사적 받은 의창이 창원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창원으로 하였다. 구종길의 아들 구복한(具復漢)은 전라 병마 절도사를 지냈다. 단종 때 등과하여 사헌부 장령을 지낸 구자평(具自平), 중종 때 창원 교수로서 영남루의 상량문을 지은 구유온(具有溫), 선조 때 등과하여 이조참판에 추증된 문장공(文章公) 구정설(具廷說), 임진왜란 때 공신인 구응진(具應辰), 구응삼(具應參) 등이 이름났다.
『정조실록(正祖實錄)』과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1791년(정조 15) 7월 구시창(仇始昌)이 초관(哨官)의 후보자로 왕에게 단자가 올려졌을 때 왕이 “구(仇)라는 성은 구(具)만 못하니 구(具)자로 성(姓)을 고치라.”는 「사성연교문(賜姓筵敎文)」을 내렸다. 이 교시에 따라 1798년(정조 22) 6월부터 모든 공사 문서에 ‘구(具)’로 오르게 되었다. 그 후의 내력은 알 수 없으며 1924년 족보를 만들면서 일부는 능주, 회산으로 본관을 바꾸었으나 같은 혈족으로 여긴다.
창원 구씨는 부사 공파(府使公派)·진사 공파(進士公派)·승지 공파(承旨公派)·처사 공파(處士公派)의 4개 지파로 갈려져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진흥왕 때의 장군 구진(仇珍), 진평왕 때의 대사(大舍)인 구문(仇文), 문무왕 때의 사찬 구진천(仇珍川) 등 다수의 구씨(仇氏)가 있으나 창원 구씨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불분명하다.
[현황]
창원 구씨는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송정리와 북면 내곡리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봉산리에 시조공(始祖公) 의창군 구성길의 유허비 및 제단과 중시조 천곡공(川谷公) 구종길의 제각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창원 구씨 문중은 매년 10월에 제향한다. 구종길의 묘갈명과 구복한 묘 및 불피 고개에 창원 구씨 묘역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