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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372
한자 朝鮮時代
영어의미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조선/조선,근대/개항기
집필자 안홍민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경기도 광명 지역 역사.

[개설]

조선 왕조는 1392년 7월 17일[음력]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에게서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름으로써 시작되었다. 경기도 광명 지역은 조선시대에 금천 또는 시흥이라 일컬어졌던 지역에 주로 속해 있었다.

[행정구역의 변천]

금천은 고구려의 잉벌노현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금주(衿州)라고도 불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광명 지역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금주에 속해 있었다. 금주는 1413년(태종 13) 금천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주(州)’라는 명칭을 쓰는 고을 중 읍격이 그에 어울리지 않은 곳은 ‘천(川)’이나 ‘산(山)’으로 바꾸도록 하는 제도가 시행되면서이다. 금천현은 이듬해 과천과 병합되어 금과현이 되었으나 두 달여 만에 혁파되어 다시 양천과 합쳐 금양현이 되었다. 하지만 역시 1년 만에 혁파되어 금천으로 복구되었다.

금천은 세조 대에 과천과 다시 병합하였으나 곧 분리, 복구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금천 지역이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사신 접대 등으로 현의 부담이 커지자 1593년(선조 23)에 금천을 다시 과천과 병합하려 했으나 지역민이 반발하여 무산되었다. 금천현은 1795년(정조 19) 정조의 명에 의해 현의 명칭을 시흥현으로 바꾸었고, 1895년(고종 32)에는 8도제가 26부제로 바뀌면서 동시에 ‘현’이라는 명칭도 ‘군’으로 바꾸어 시흥군이 되었다.

[사회와 경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조선 전기 금천현은 과천과 부평, 안산 등과 접해 있었으며, 호수는 327호, 인구는 937명,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명, 선군(船軍)이 73명이었다. 한편 지역의 토성(土姓)은 이(李)·조(趙)·강(姜)·장(莊)·피(皮)·계(桂) 등 총 여섯이었으며, 망성(亡姓)으로 윤(尹)과 추(秋)가 있었다.

지역의 환경을 살펴보면, 토질의 경우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이 각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간전(墾田)이 2,762결(結)이며, 그 중 논이 차지하는 비율은 5분의 2 정도였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팥·녹두·메밀·수수[唐黍]·참깨·뽕나무·삼[麻]이 있었고, 토공(土貢)은 지초(芝草), 주요 생산 약재(藥材)는 백편두(白扁豆)였다. 또한 현 내에 반유역(盤乳驛)이 있었으며, 목장이 두 군데 존재했다. 또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금천현은 당시 지방군의 방위 체제인 진관(鎭管) 체제 하에서 거진인 수원진관에 속해 있었으며, 수령은 종6품 무관인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조선 후기 금천현의 모습은 영조 대에 제작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잘 나타나 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조선 후기 금천현의 호수는 1,873호이며, 인구는 남자가 3,322명, 여자가 4,441명으로, 호구 수가 조선 전기에 비해 크게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금천현에 속한 면리 수는 총 6개 면에 39개 리가 속해 있었다. 토지의 경우 총 결수를 살펴보면 한전(旱田)은 765결(結) 30복(卜) 6속(束), 수전(水田)은 510결 47부 7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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