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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제한이 가져다 준 혜택, 옛 풍속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광명의 자연마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002
한자 開發制限-惠澤-風俗-光明-自然-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철원

[개설]

광명 지역은 남북으로 가학산서독산, 구름산, 도덕산이 길게 시의 중앙을 가로지르며 형성된 지역이다. 이 산들을 중심으로 광명동철산동, 하안동, 소하동, 일직동, 가학동, 노온사동에 속한 자연마을에 깃들여 많은 사람들이 누대에 걸쳐 살아왔다. 그러나 도덕산 자락의 철산동하안동, 광명동 지역은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급격하게 진행된 도시화로 본 모습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그런 면에서 1974년 시행된 그린벨트 정책으로 개발이 제한된 소하동학온동[노온사동·가학동]의 자연마을이 마을 공동체가 함께 지켜 온 민속 신앙을 비롯한 우리의 옛 풍속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하지만 최근 들어 마을에 들어서는 소규모 공장 등으로 자연마을의 모습과 거주민들이 바뀌고 있다. 또한, 앞으로 예정된 보금자리 주택 건설 등으로 자연마을이 자리 잡은 이 일대가 모두 새롭게 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광명동의 자연마을]

현재까지 광명동에 남아 있는 자연마을로 옛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곳은 원광명이다. 넓은 의미에서 1993년 광명시에 편입된 옥길동식골·두길마을광명동과 관련 있는 자연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옥길동의 행정동이 광명6동이기 때문이다.

원광명은 광명시에서 이름을 따 온 동네로, 원래는 괭메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곳인데, 도덕산을 동쪽에 등지고 있는 서향받이 마을이다. 마을은 동서로 길게 자리 잡고 있어서 동쪽을 웃말, 서쪽을 아랫말로 부르기도 한다. 웃말과 아랫말 중간에는 광명시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이 300년도 넘는 회화나무가 마을 정자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예전 마을의 형상은 많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원광명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일에 도덕산 아래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부정하지 않은 마을 주민들 중에서 당주를 선정해 제를 지냈으나 1980년대부터는 통장이 당주와 제주를 겸하고 있다.

옥길동은 부천 옥길동과 시흥시 무지내동 사이 오금로가 지나가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옥길동의 자연마을 중 하나인 두길봉예골과 부평골 사이에 위치해 있다. 구로구 천왕동에서 옥길로를 따라가면 천왕동과 경계를 이루고 시작되는 옥길동 첫 마을이 두길이다. 4차선 도로인 옥길로는 이 두길을 양쪽으로 나누며 새로 생겨난 도로이다. 조선 후기에 철산부사를 지낸 하섭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부평말 중앙에 연못[못배미]을 파고 유유자적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그 후손들이 분가를 하면서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두길식골 사이에 있는 봉예골에서 마을 앞을 경유하여 광명동 너부대를 왕래하는 길이 대로였으나, 시흥시 금이동과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을 관통하는 길이 마을 중앙을 지나면서 길 양편에 민가가 생기고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길 뒤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뒤길이라고 했다가 후대에 ‘두길’로 불렸다고 한다.

두길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 가운데말 소나무 앞에서 산신제를 지내 왔으나, 1980년대 이 일대에서 양돈을 하면서 악취가 나고 주민들이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면서 제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산신제를 지내던 야산도 깎여서 지금은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두길에서 금오로를 따라 시흥시 과림동 방향으로 나아가면 봉예골을 지나 식골이 나온다. 마을의 주산은 만수산으로, 마을 서쪽에 있다. 이곳에 살면 만수를 누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또 광명동에서 이 마을을 바라보면 배부른 사람이 누워 있는 형상처럼 보이고, 산봉우리가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식골[식곡]’이라고 불렸다.

식골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일에 가운데말 노변에 있는 대동우물에서 우물고사를 지냈다. 우물고사를 지낼 때면 마을 주민들이 우물 주변을 청소하고, 함께 고사를 지내며 어울렸다. 또 마을에 초상이 나면 액을 막기 위해 우물을 덮어 놓기도 했다고 한다. 우물물 역시 깨끗하여 바가지로 퍼 먹는 우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우물 주변에 지하수를 파기 시작하자 물이 줄어들면서 우물을 이용하지 않게 된 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우물고사도 지내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새롭게 난 도로로 인해 우물터도 사라져 버렸다.

우물고사는 사라졌지만 음력 7월 초와 10월 초에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도당고사는 지금도 지내고 있다. 시흥과 경계를 이루는 도당고개에 네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도당고사는 바로 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지낸다. 1990년대만 해도 당주를 선정하는 것도 엄격했으며, 마을의 입구와 당주 집에는 금줄과 황토를 뿌리고, 도당나무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가서도 안 되는 등 지켜야 할 금기가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도당고사는 여름에는 대략 정오가 지나서 시작되고 가을에는 해가 떨어지면 시작한다. 도당고사는 여름과 가을 모두 마을 사람들이 무병하고 무고하기를 기원하는 기원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도당고사는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4~5일 정도 이어질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지금은 마을의 노인회장을 비롯한 통장이 나서서 하고 있다. 음식을 비롯한 뒷바라지는 마을 부녀회 회원들이 마을회관에서 준비하고, 고사를 지낸 후에는 마을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여서 다 같이 식사를 나눈다. 예전처럼 주민들의 참여가 많지 않고 동네에 입주한 공장 사장들도 별로 호응이 없는 편이다. 신목인 느티나무는 ‘도당나무’로서 마을에서 신성시 여기고 있는데, 광명시에서도 1982년 10월 15일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학온동·노온사동·가학동의 자연마을]

광명로를 따라 시흥시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왼쪽 편으로 줄줄이 연결되어 있는 자연마을들을 만날 수 있다. 가락골·원노온사·능촌·사들·동창골·장절리까지는 노온사동이고, 그 너머 갓골부터는 가학동이다. 가학동의 경우 안양까지 연결되던 예전 도로를 따라 갓골·도고내·공세동·노리실·장터말이 형성되어 있다.

노온사동가락골이란 이름에는 ‘아름답고 즐거움이 가득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예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가락을 좋아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설도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원노온사는 예전에 노온사라는 절이 이곳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절 이름이 마을 이름에까지 남을 정도면 큰 절이었을 법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도 찾기가 어렵다. 원노온사와 가락골을 이어 주던 소로는 지난 2008년에 확장되었고, 그 길을 따라 대형 식당들이 자리하고 있어 예전 풍경은 많이 사라진 상태이다.

능촌은 아방리·아왕리·앙외·능말이라고도 불리던 마을로, 예전에는 시흥 소래에서 서울로 넘어가던 길인 한치고개 초입에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동네이다. 일제강점기 서면공립보통학교 노온사분교장[현 온신초등학교]이 이 마을에 세워진 것도 마을이 한치고개 초입에 있었기 때문이다.

능촌은 마을 가운데를 도로가 관통하기 전까지는 옛 모습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던 전통 마을이었다. 그 중 공식 지명이라 할 수 있는 아방리는 그 유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조선 전기 금천현 남면이었던 지역이 1795년(정조 19)에 시흥현 남면 노온사리에 속한 아방리로 불렸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아방리는 1795년 이전부터 이미 아방리란 고유 명칭으로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능촌이란 이름은 이 동네의 주산인 구름산 자락에 민회빈 강씨의 묘[영회원]를 쓰면서부터 불리기 시작하였다. 1646년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민회빈 강씨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사되었다가 1718년 무죄가 밝혀졌는데, 그 후 세자빈으로 복위되어 그 묘도 민회원으로 추존되었다가 1903년 영회원으로 개칭되었다. 민회빈 강씨는 이 지역 세거 성씨인 금천강씨 집안의 사람이다. 아방리가 속한 학온동 2통에는 새터말가운데말도 있다.

능촌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고사를 지내고, 줄다리기와 쥐불놀이 등을 벌였는데, 이것은 1년 중 중요한 행사로서 이웃 여러 마을에서 구경 올 정도로 큰 축제였다고 전한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줄다리기의 경우, 여자와 남자가 따로 편을 먹고 겨루는데, 여자 편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 하여 남자 편이 일부러 져 주는 것이 관례였다. 농번기 때는 「모심고」와 「논매고」 등의 농요가 성행했다.

아방리 농요는 450년 전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우리의 전통 민요이다. 지금은 몇 사람만이 기억하고 있는 소리이나, 2003년 경기도 민속예술축제를 계기로 새로 발굴되어 2004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방리 농요아방리 줄다리기는 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한 아방리 민속보존회에서 전승하고 있다

구전으로 불렸던 아방리 농요는 여러 사람이 작업을 할 때, 삶의 애환이 담긴 내용을 소리 중간에 노래로 한 소절씩 가락을 넣어 선창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서 부르는 선후창 형식의 노래이다. 아방리 농요는 「모심고」·「김매고」·「농신제」·「고시레」 등 흥겨운 소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농경 사회에서 이뤄졌던 벼농사 과정을 몸동작과 소리로 승화해 농사의 고단함을 해소하고 풍년을 기약하는 것은 물론, 공동체 형성과 일체감을 조성하였던 소리다.

노온사동의 자연마을인 사들은 모래벌판에 세워진 마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동네에 소재한 묘의 주인공인 정원용(鄭元容)[1783~1873]이 기록한 일기에는 ‘사벌(沙垡)’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1993년에 발간된 『광명시지』에 의하면, 정원용의 옷을 걸어 놓고 하던 군웅제와 마을 우물에서 행하던 용왕제가 음력 정월 초3일에 행해졌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노온사동의 자연마을인 사들은 모래벌판에 세워진 마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동네에 소재한 묘의 주인공인 정원용(鄭元容)[1783~1873]이 기록한 일기에는 ‘사벌(沙垡)’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1993년에 발간된 『광명시지』에 의하면, 정원용의 옷을 걸어 놓고 하던 군웅제와 마을 우물에서 행하던 용왕제가 음력 정월 초3일에 행해졌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동창골은 임진왜란 때 세운 전공으로 호성공신 3등에 녹훈된 김응수의 11세손인 김계욱[1835~1892]이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에서 이주한 후부터 형성된 마을이라고 전한다. 김계욱은 분성김씨 종손으로 선조인 김응수를 기리기 위해 자신의 집과 마주보이는 동쪽에 사당을 짓고 선조의 공덕을 흠모했다고 한다. 이 사당이 영모재이다.

영모재는 2005년 집안에서 전해 오는 고문서 15점과 함께 광명시 향토문화유산 제5호로 지정되었다. 광명시는 영모재를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이유에 대해,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전통 양식에 따라 정면 3칸과 측면 1칸의 전통 사당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로서, 선조의 공덕을 기리고자 하는 후손들의 노력을 높이 샀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김계욱은 자신의 유언대로 죽은 뒤에 영모재 옆에 묻혔는데, 후에 후손들이 영모재를 지나 윗장절리로 넘어가는 산세의 지형이 뱀의 모양을 하고 영모재를 바라보는 형국이라 좋지 않다고 여겨, 영모재의 담을 높이고 나무를 심었다고 전한다.

동창골에서 마을 안쪽으로 이어지는 동창골길을 따라가면 윗장절리가 나온다. 장절리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외넘어·윗장절리·아랫장절리로 동서 방향을 따라 길게 늘어선 마을 모양이 길게 이어져서 ‘장절’이라 불렸다는 유래와, 외넘어 동북간 200m 지점에 ‘장절’이란 절이 있어서 마을 이름도 장절이란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대체로 길게 늘어진 마을의 모양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회관이 있는 아랫말 동쪽 야산에는 무송윤씨의 선현 묘가 있고, 그 묘역 아래는 상여집이 있다. 이곳에서 살다가 나간 주민이 외지에서 나가 죽은 경우라도, 이곳에서 묘를 쓸 경우 이곳 상여를 이용한다.

가학동 갓골의 뒷산은 풍수지리학적으로도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갓골과 동창골 사이 능골은 학(鶴)의 서식처였다고 한다. 또 마을을 학들이 멍에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라고 하여 가골[駕谷]이라고도 불렀다. 가학동이란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했으며, 원가학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갓골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로 추측한다.

조선 전기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옥천부원군에 봉해진 설계조(薛繼祖)의 후손들이 시흥시 군자동에서 살다가 조선 후기 이곳으로 이주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설계조의 사당인 경모재가 1980년대 후반 개축되어 전한다. 후손들에 따르면, 예전에는 「설계조 영정」과 칼 등이 함께 전해져 왔다고 하나 현재는 영정만 전하고 있다. 「설계조 영정」은 2009년 광명시 향토문화유산 제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갓골은 학온동 동사무소 소재지이다. 한편, 마을 뒷산에는 연산군 때 대사헌을 역임한 구치곤의 묘가 있다. 구치곤의 묘에는 4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인석이 특유의 모양을 띠고 있고, 비석 역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마을 옆으로 안산과 광명 간 도로인 광명로가 남북으로 나 있고, KTX 광명역에서 가학터널을 지나 시흥 방면으로 이어지는 서독로가 새로 개통되어 마을을 동서 방향으로 가르며 지나간다. 또한 서독로 개통 전의 2차선 가학로가 마을에 인접해 있다.

갓골에서 가학로를 따라 넘어오면 도고내 초입이 나온다. 가학산 아래 광명시 자원회수시설이 멀리 보이면서 마을이 시야에 들어온다. 도고내의 다목적 마을회관이 새길 건너에 새로 건축되었는데, 이것은 기피 시설로 여겨졌던 소각장 시설이 들어오면서 그 보상으로 지어진 것이다. 도고내에는 두 개의 우물터가 있어서 7월 백중이면 우물터를 청소하고,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잔치도 벌이면서 재미있게 지냈다고 하나 마을이 변화를 겪고 외지인들이 들어오면서 중단되었다.

도고내의 명칭과 관련해서 전해 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째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마을의 지세가 독안처럼 생겼다고 하여 도구내라 불렸다고 한다. 둘째로는 이 마을의 동쪽인 솔안을 지나 산을 넘어 소하동 서러리[설월리]로 가는 산 고갯길이 있는데, 이 고개를 도고내고개라고 해서 마을 이름이 도고내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교통편의 발달과 함께 고갯길을 넘는 곳에 군부대 등이 있어 돌아서 가야 하는 이유 등으로 지금은 거의 이용되지 않지만, 예전에는 이 마을 주민들이 구로구 시흥2동에 가거나, 서면초등학교서면사무소가 있던 소하동 서러리를 갈 때 이 고개를 이용했다. 또한 안산의 염부들이 소금을 싣고 서울 염창동에 갈 때도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노리실은 부르는 억양에 따라 변음되어 노루실이라고도 한다. 아주 먼 옛날에 이 지역이 산림이 울창해서 노루가 많았다고 하여 노루실로 불리다가 노리실로 변음되었다고 전하기도 하나, ‘노루’는 ‘넓다’라는 말에서 그 유래를 두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노리실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초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마을 제사를 지낸다. 예전에는 마을의 중간에 느티나무가 있어 그 나무 아래에서 당제를 지냈지만, 이 나무가 소실된 이후에는 마을 앞산에 당집을 짓고 그곳에서 군웅제를 지내고 있다. 군웅제라는 이름으로 마을제가 전하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예전에는 음력 10월 10일쯤 올렸지만 지금은 추수 후에 택일을 한다. 군웅을 모신 당에 볏짚으로 터주를 세워 두고 있다.

노리실에서는 제사 날짜가 다가오면 부녀회장과 통장 부인 등 여자들이 장을 봐 온다. 제의를 담당하는 제관은 마을 임원들이 당연직으로 맡고 있다. 목욕재계 등도 자신이 알아서 하는 등 금기가 많이 약화된 상태이다. 제의는 오전 10시에 행해지는데, 먼저 남자 둘을 대표로 하여 산봉우리에 가서 산제를 올린다. 산제를 올린 후에는 당으로 내려와 제물을 진설하고 절을 한다. 철상 후에는 마을을 향해 상을 차린 후 동네가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모두 절을 한다. 이후 마을회관에 가서 음복을 하고 점심식사를 한 후 헤어진다. 예전에는 마을 잔치도 벌였다지만 지금은 행해지지 않는다.

가학동공세동에서도 음력 3월에서 4월 사이 모내기 전에 마을 고사를 행하는데, 이는 마을에 교통사고 등 우환이 자주 생기면서 1990년대 후반부터 다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공석골가학로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뉘어 있다. 가학로 변에는 마을회관이 있고, 그 뒤로 고갯길을 따라 오르면 마을 정자를 지나 공세동 위쪽 마을의 전경이 들어온다. 도로변 아래 마을과 달리 위쪽 마을은 비교적 규모 있는 주택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공석골이란 이름은, 조선 명종 대에 군자감정을 지낸 성몽규가 군자감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인 공물과 세금을 받아들이고 출납을 하였던 곳이라 하여 ‘공세동’이라 불린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이곳은 조선시대 시흥군 남면의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 창고는 남면 주민들과 인근 주민들이 세금으로 낸 미곡을 쌓아 두던 곳이다. 당시 창고가 있었던 자리는 뒷골과 이 마을 사이에 있는 천산 고갯마루 부근이었다고 한다.

공석골은 조선시대에 뒷골 또는 유등리로도 불렸는데, 이는 마을 동쪽에 문화유씨 선현 묘가 있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한다. 문화유씨가 이 마을에 정착한 것은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문화유씨 족보에 따르면 광해군의 장인인 유자신의 고손 유성귀[1620~1671]의 묘를 쓴 후 그 후손들이 이 묘 아래 집성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문화유씨 묘역은 2009년 가학로 확포장 공사로 바로 옆에 재조성되었다. 한편 이 마을에서는 성몽규의 후손들도 집성을 이루고 크게 번성하였다.

[일직동의 자연마을]

일직동의 ‘일직’이란 이름은 허목(許穆)이 쓴 이순신 묘(李純信墓)의 묘비[일직동 호봉골KTX 광명역 건너편에 있음]에도 기록된 오래된 이름이다. 그러나 현재 마을은 KTX 광명역세권 개발로 마을 전체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고 있으며, 자경리호봉골에 새로 조성된 이주 단지만이 남아 있다.

마을이 폐동되기 전에는 양지편을 중심으로 서독산 자락에서 당고사를 지내고, 자경리·덕안·구석말 주민들이 성재산에서 산제사를 지내기도 했었다. 이 중 양지편·호봉골[虎鳳谷]·구석말·모텡이·새터말 주민들이 함께하던 산제사는 오리로가 확장되면서 원래의 자리에서 이주하여 호봉골 뒤편 이주 단지의 삼석산 중턱으로 옮겨 음력 10월 1일 거행되고 있다. 양지편의 자연마을 호봉골구름산의 연봉인 삼석산(三石山)을 주산으로 서쪽과 남쪽, 북쪽이 산으로 에워싸고 있고 동쪽만 트인 마을로, 동서가 길게 생겨 서쪽 지역을 웃말, 동쪽 지역을 아랫말이라고 각각 칭한다. 호봉골새터말소하동 영당말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호봉골은 효종 때(1657) 우의정을 지낸 이후원(李厚源)[1598~1660]의 묘를 삼석산 중턱에 쓴 후 그의 후손[전주이씨 광평대군파]들이 세거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이후원의 묘는 이장된 지 오래 되었다.

한편, 자경리의 산제사는 음력 10월 1일 성재산에서 지낸다. 자경리 산제사도 제2경인고속도로 공사로 원래의 자리에서 옮겨진데다 주민들도 상당수 이주하여, 자경리에서 오래 세월 살아온 광산김씨 집안의 김종학 씨 등이 작은 규모로 올리기도 하지만 거르는 해도 있는 형편이다. 자경리는 새마을 운동과 4-H운동이 근동에서는 제일 먼저 일어난 선구적인 동네로, 예전에는 선진 마을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는 칠월 백중날에는 소도리기라는 쇠고기 먹는 행사가 이 마을에서 벌어졌다. 백중 전에 마을 사람들은 백중날에 소를 돌려먹기 위해 돈을 모으고, ‘호미걸이’에 맞추어 소를 잡았다고 전한다.

[소하동의 자연마을]

소하동가리대·한내소하1동 지역과 소하2동설월리·영당말·오리동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이외에도 신촌70동 마을[이상 폐동], 40동 마을 등 현대에 형성된 마을이 있다.

가리대구름산의 연봉인 뾰죽산을 주산으로 하여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여 있고, 동쪽이 트인 동향받이 마을이다. 마을의 명칭과 관련해서는, 풍수지리상 마을 앞이 허해서 복이 나가고 재앙이 들어온다고 하여 마을과 가리대삼거리에 소나무와 버드나무 등을 심어 마을 앞을 가렸다 하여 ‘가리대리’라 하였다는 유래와, 서러리[설월리]에서 갈라져 나온 마을이라는 뜻에서 ‘가리’가 ‘가리대’가 되었다고 하는 유래가 있다. 마을 중간에 가리대 다목적 회관이 있는데, 청소년 공부방과 노인정으로 활용되고 있다.

가리대에서는 음력 10월 초3일에 주민들이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다목적 회관에서 모여서 출발해서 구름산 중턱에 있는 신목에서 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산제사 당일 마을 사람들의 통행까지 금지하는 등 금기 사항도 엄격했지만 최근에는 저녁 8시경에 시작해서 1시간 이내에 마친다. 참여자도 주민 10여 명에 그치고 있다.

소하2동설월리[서러리]는 ‘큰말’이라고 불리던 동네였다. 그만큼 인근에서는 가장 큰 동네였다고 알려져 있다. 설월리라고 하는 마을 이름에 대한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해진다. 첫째는 조선 후기 명재상으로 유명한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이 관직에서 물러나 선산이 있던 이 마을에 은거할 때 나이 많은 재상(宰相) 일가가 어찌나 근면하던지 달빛 아래서도 호미로 김을 매고 일을 했다고 하여 서월리로 불렸다는 것이다. 즉, ‘호미 서(鋤)’에 ‘달 월(月)’을 붙여 마을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지금은 ‘서러리’로 변음되어 불리고 있다. 또 하나는 이원익이 눈 내리는 밤에 이곳을 걸으며 사색에 잠기곤 해서 ‘설월리(雪月里)’로 부른다는 것이다. 산자락에 내린 달빛 어린 설경이 그만큼 아름다웠다는 의미이리라. 예전에는 안산과 시흥 사람들이 서울을 갈 때면 도고내고개를 지나 이 마을을 경유해야 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교통의 요지로 발달했으며, 일제강제기엔 시흥군 서면사무소와 공립보통학교가 생기면서 마을이 더 커졌다고 한다.

설월리에서는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 영당말작은말 주민들과 함께 전주이씨 익녕군파 선현 묘와 현대아파트 사이 능선에서 도당고사를 지냈으나, 1989년 이 일대 구획 정리 사업으로 인해 도당나무가 훼손되면서 1992년부터 당고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1800년대에 작성되어 이원익 가문에 전하는 「군부인조씨이하 13세손 족장도」에 그려진 지도에 도당첨(禱堂첨)이라는 지명이 마을 뒷산 능선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도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어느 시기엔가 무당이 제관으로 등장하면서 도당굿 형식으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에는 이를 도당놀이로 변형하여 전국민속예술축제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이후 제를 주관하던 만신이 죽자 명맥이 끊어졌으나 마을 주민 일부가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안동의 자연마을]

하안동은 1985년 이후 하안동 개발로 인해 가림·안현·안터·하평리 등의 자연마을이 사라졌다. 다행히 밤일마을은 그 모습을 보전하고 있었으나 2009년의 밤일지구 개발 사업으로 폐동되었는데, 2011년 전원주택 단지로 새롭게 조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밤일마을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하안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어서 하안리교회 출석인 교인 수가 3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1980년대 하안동의 성장에 비해 낙후되어 주민들의 불만도 적지 않았던 동네이다. 해마다 음력 7월 1일이면 아랫말 논가에 있는 대동우물에서 우물고사를 지내고 마을 뒷산에서 산신제를 지냈지만, 1970년대 초반 교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중단되었다고 전한다.

[의의와 평가]

광명시는 서울 근교에 위치하여 까닥했으면 무분별한 개발이 이루어질 뻔했으나 1974년 시 전체의 77% 이상이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이게 되었다. 그린벨트 지역에 속한 동네들은 집의 수리조차도 어려운 현실로 불편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현대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19990년대 초반까지도 옛 마을의 정취와 마을 공동체 풍속을 간직할 수 있었다. 비록 2010년 현재는 크고 작은 규모의 개발 사업으로 상당수의 마을이 폐동되고 주민들도 흩어졌지만 지난 세월 자연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지켜 냈던 마을제와 공동체 정신은 오늘날 외지인들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광명시의 현실에서 지역의 정체성과 뿌리를 확인해 주는 귀중한 문화 자원으로 남아 언젠가는 고귀한 문화 콘텐츠로 꽃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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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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