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C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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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광명시 철산3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양철원 |
[철산리의 옛 이름 쇠머리]
철산리는 옛날에 쇠머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쇠머리’란 도덕산에서 안양천 쪽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가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철산리(鐵山里)의 철(鐵)은 소[牛]의 경기도식 발음인 ‘쇠’가 ‘쇠 철(鐵)’ 자로 혼동돼 기록된 것으로 추측된다. 산(山)은 고어에서 머리처럼 튀어나온 부분을 표기할 때 쓰이는 예에 따라 사용되었다. 구전에 따르면 이곳 우물물에는 철분이 많았다고도 한다.
철산리는 300여 년 동안 농경을 바탕으로 한 집성 마을이었으며 철산리 사람 하면 으레 장씨 집안으로 여겨졌다. 덕수장씨를 ‘쇠머리장씨’라고 부를 만큼 철산리는 덕수장씨의 세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덕수장씨의 세거는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에서 분전하다 전사하여 선무원종공신으로 추증된 충의공(忠義公) 장응기(張應箕)의 셋째 아들인 장준(張晙)이 고향 행주를 떠나 이곳 철산리에 정착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인근 영등포 주변의 산업이 발달하고 외지인들이 몰려들면서 철산리 지역에도 외지인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외지인들은 기존 농업에 흡수되어 농사를 짓거나 영등포, 문래동 등지에 임금 노동자로 나가기도 하였다.
[철산리 참외와 옛 풍경]
1970년대 철산리 이장을 지냈던 장광진[1932년생] 씨에 따르면, 1960년대에는 이곳에서 논농사 외에도 참외 농사를 많이 지었고, 뱀수다리 너머에서 장이 크게 열리면 영등포시장 상인이 자전거를 타고 와서 참외를 사가지고 갔다고 한다.
당시 오류동 참외가 유명했는데, 철산리와 광명리의 참외도 오류동 참외로 알려져 팔렸다고 한다. 장광진 씨는 시장에서 팔리지 않고 남은 참외는 광주리 두 개씩을 지고 구로동 주택가에 가서 팔곤 했다.
1955년 고향 부여를 떠나 철산리에 정착한 최종선[70세] 씨는 철산리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참외와 오이 등이 주 작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1970년대 새마을 지도자 활동을 하고 공화당 서면청년위원회에 나가기도 하면서 지역에서 인정받기 시작해서, 시 개청 이후에는 철산리를 떠나 하안동에 거주하면서 별정직 동장과 시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최종선 씨의 경우만 봐도 알겠지만 철산리는 비록 장씨 집성촌이었지만 타 지역에서 이주해온 주민들에 대한 배타성이 강하지 않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예부터 서울 인근 지역인 영등포 같은 큰 동네[대처]와 접촉이 많았기에 폐쇄성보다는 개방성이 강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철산동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의 전형적인 풍경을 가지고 있었고, 마을 도처에 옛 이름들이 남아 있었다. 지금의 광명경찰서 뒤 보건소 자리는 ‘군두물’이라 불렸는데, 일제강점기 관에서 나와 검사하면 철분이 많아 제일 좋은 물로 여겨졌다. 논에서 물이 치솟아서 부녀자들이 빨래를 하러 모이던 곳도 인근에 있었다.
광명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석고개라 불렸다. 갠이불로 넘어가는 입구 마을은 철미마을이다. 철미마을 앞산에는 복숭아밭이 꽤 크게 있었는데, 토박이들 중에는 초가을 아직 덜 익은 파란 복숭아를 따다 먹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철산주공13단지 우체국 부근은 ‘밭머리 웅뎅이’라 했고, 왕재산 너머 논 쪽 방향은 ‘건넝갈’이라 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지금 광명시청 아래쪽에 신앙촌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어 신앙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곳에는 장씨 소유 땅이 많았는데, 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미담도 많이 남겼다. 장세일 씨는 1960년대 서면국민학교 철산분교[현 광명광덕초등학교]가 개교할 때 학교 부지와 도로 부지를 희사했고, 장광진 씨는 1970년대 광명출장소 시절 철산분소[현 철산2동주민센터] 터 및 1980년대 철산3동 치안센터 부지를 희사하였다.
장교진 씨는 1977년 자신의 토지를 당시 안양경찰서[현 광명경찰서]에 무상으로 기부하여 철산1리부터 7리까지를 관할하는 철산파출소 신축 부지로 사용하게 하였다.
장순인 씨는 1982년 철산중심상업지구 내 보건소 부지[현 광명시 평생학습원 부지]를 희사하였다.
덕수장씨 사람들은 이렇듯 지역에서 유익한 공공시설을 세우는 데 기틀을 제공한 분들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본보기가 된 분들이다.
지금의 철산한신아파트에서 철산대교를 넘어 좌측 유수지에 26번 버스 종점이 있었고, 1980년대에는 철산천변으로 버스가 다녔다.
1968년에는 박람회를 치르고 구로공단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후 참외장이 서던 안양천 뚝방 아래로 들어온 각성바지들이 무허가 판자촌을 지었고, 술집도 들어섰다.
모테이라 부르던 현 철산초등학교 앞 복개천 테니스장 앞길은 도깨비 웅뎅이라 하여 약간 읍습한 곳으로, 아이들이 무서워하던 곳이었다. 하안리로 넘어가던 철미고개에는 울긋불긋 천을 걸어 놓고 돌을 던져 쌓아 놓은 서낭당이 있었다. 지금의 안현과 철미고개는 길이 새로 확장되면서 예전과 위치가 다소 달라졌다.
철산리 주민들은 홍수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 지역은 안양천 제방이 있어 수해는 덜 했으나, 그래도 비가 많이 오면 산 아래까지 물이 차올랐다고 한다. 철산1동과 철산2동은 더 심해서 홍수 피해로 삼시 세 끼 밥을 제대로 먹는 집이 별로 없었다. 1년 농사를 망치면 3년을 빚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부터 형성된 현 광명광덕초등학교 옆의 철산시장은 철산4동 산동네 사람들이 다니던 길목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곳이었다.
철산시장을 관리하던 안삼영 씨를 비롯한 시장 상인들은 철산중심상업지구가 개발됨에 따라 상업 지구 동편 철산주공12단지 경계 지역에 철산중앙시장과 철산시장을 현대식 상점가로 건설하여 이전하였다.
철산동 417번지를 원적으로 하고 있는 장순철[1955년생] 씨는 1980년대 개발 계획으로 집안 소유 땅이 시에 수용되자 지금은 재개발이 된 장미아파트 7동으로 이사 갔다가 현재는 철산주공13단지에 살고 있다.
장순철 씨 네와 같이 철산리가 개발되며 농토가 수용된 많은 토박이들이 새로운 생활을 선택해야 했다. 일부는 수용비를 종자돈삼아 서울로 이주했고, 수용비를 많이 받은 경우에는 새로 조성된 상업지구와 주택가에 건물을 세워 건물주가 되었다. 상점을 열어 자영업자로 변신한 경우도 있었다. 300년 전통 농촌 마을에 불어 닥친 도시화의 격변은 이렇듯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변화시켰다.
장순철 씨는 젊어서는 서울의 시계방과 금은방에서 일하다가 고향 철산동이 개발된 후 상업지구 내 중앙시장에 금은방을 차려 지금도 운영 중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금값이 오르고 예전만큼 금의 수요가 많지 않아 매장 옆에 식당을 열어 부인이 운영 중이다.
장순철 씨는 철산리에 처음 세워진 광명광덕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1966년 학교를 졸업했다. 당시는 한 학년에 한 학급만 있었고 학생 수도 44명에 불과했다. 1회 졸업생까지만 해도 농사꾼의 자녀들이라 멀리 타지로 가는 경우는 적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졸업생 중 10여 명 이상이 1년에 한 번 정도 모이고 경조사에는 서로 잊지 않고 만나고 있다.
장순철 씨의 경우처럼 토박이로 철산동에 계속 거주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시가 개청한 후 철산3동이 개설되자 동사무소를 중심으로 조직된 각종 조직에 가입하여 참가하는 등 지방자치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장순원 씨는 비교적 젊은 30대에 1대와 2대 시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장순철 씨는 철산3동의 바르게살기협의회 위원장과 체육회장을 맡아서 봉사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지금은 철산3동에 다양한 시민들이 이주해와 직접적인 관여는 하지 않고 있다. 그래도 중요한 동 행사 때는 성의를 표시하는 정도는 하고 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