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C010102 |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철산3동 45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양철원 |
[덕수장씨 세거지와 충의사]
철산동 쇠머리 지역은 예부터 덕수장씨 일족이 모여 살던 세거지였다. 덕수장씨 가문이 철산2동에 정착한 것은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싸우다 전사한 충의공 장응기(張應箕)의 영정을 그의 넷째 아들 장준(張晙)이 옮겨 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장준의 후예들은 충의사라는 사당을 건립해 대대로 제를 지내 왔다.
철산주공12단지 내의 나지막한 야산인 왕재산 주변이 덕수장씨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왕재산은 원래 덕수장씨의 선산이었지만 철산동 개발계획으로 묘역은 이장되고 충의사도 원래 위치에서 위쪽으로 이전되었다.
산소는 직계 후손들이 파묘 후 화장을 하여 각자 모셨다고 한다. 광명시에서는 1984년부터 이곳을 근린공원으로 지정해 관리해 오고 있다. 덕수장씨 선산은 지금의 광명고등학교 인근에서부터 왕재산까지에 이르렀다.
덕수장씨 장응기의 후손들은 이곳 철산리 외에도 고양과 평택 등으로 이전하여 세거했는데, 매년 음력 10월 10일[1990년대 이후 10월 10일을 정확히 맞추지 않고 그 날이 낀 일요일에 거행함]은 광명 철산리 후손들이 시제를 지내는 날이다. 이 시제를 끝으로 덕수장씨의 한 해 시제는 마무리된다.
이전하기 전의 충의사 모습은 1966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간한 『한국의 마을제당』-경기편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광명광덕국민학교에 재직 중이던 교사 정완락[당시 51세]이 조사한 서면 철산리 원철산동의 마을 제당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충의사는 4평[13,22㎡]의 기와 건물로 부락 북쪽 뒷산 중턱 남향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충의사라는 이름도 없이 신주 15위를 모시고 있는 덕수장씨 사당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제를 드리는 날짜도 오늘날과는 다르게 음력 1월 1일 설에 드린다고 되어 있다. 제사 음식도 설이라 술, 떡 삼색 과일 외에 떡국을 진설한다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덕수장씨 집안 시제 모시기]
근래 덕수장씨 문중의 시제는 오전 10시에 시작해 오후 1시를 전후해 마무리된다. 주로 남자들이 참여하여 제를 올리고 여자들은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커피를 끓이는 등의 뒷바라지를 맡는다. 시제를 마친 후에는 철산중심상업지구 내 일가가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헤어진다.
헌관은 제주[종손]가 맡으며, 집례는 중앙종친회의 경험 많은 분이 한다. 시제의 순서는 강신(降神), 참신(參神), 초헌(初獻), 독축(讀祝), 아헌(亞獻), 종헌(終獻), 철찬(撤饌), 음복(飮福)으로 이루어진다. 강신은 신위가 강림하기를 비는 의식이다. 강신을 마친 후 제주 이하 모든 참여자가 두 번씩 절하는 참신을 한다. 초헌에서는 제주와 집사가 신위 앞에 잔을 올린다. 그 뒤에 축문을 읽는 독축을 한다. 아헌과 종헌은 초헌과 같다. 종헌이 끝나면 축문을 불사르고 상을 치우는 철찬이 있고, 그 뒤에 다 같이 남은 술과 음식을 먹는 음복의 순으로 진행된다.
2009년에 거행된 시제에서는 신위 앞의 제사상에 3열로 음식이 진설되었다. 1열에는 밤·배·감·다식·유과·사과, 2열에는 포·두부·육적·나물·떡, 3열에는 술잔이 있었다. 3열과 2열 사이에는 전이 두 접시 차려져 있었다.
철산리 덕수장씨의 시제는 신위에 모신 13대조부터 4대조까지를 종손들이 번갈아 가며 술과 절을 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매년 시제에는 50여 명의 후손들이 모이는데, 현재 13세손까지 이어진 장손을 비롯해 지손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 또한 고양과 평택에 거주하는 자손뿐만 아니라 가까운 중앙종친회의 어른들도 참여하고 있다. 시제에 참여하는 연령은 80대부터 20대까지 다양하며, 철산종친회의 총무와 부총무가 순서를 돕는다. 비교적 젊은 층들도 많이 참여하는 것으로 미루어 장씨 문중의 시제는 계속 왕재산에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1990년대 시제에는 당시 국회의원이나 정치가들도 간혹 인사차 참석하기도 하였지만 요즘엔 문중 사람들만 참석한다.
지금 철산동에 거주하는 덕수장씨 사람들은 덕수장씨 시조인 장순룡의 후손들로 항렬로 보면 21세손인 세0, 22세손 0진, 23세손 순0, 24세손 0수, 25세손 경0 항렬까지 약 70세대 200여 명에 이른다. 철산동 개발계획 전에는 150여 세대가 넘었다 한다. 1980년대 이후 소유 토지 대부분이 개발 사업자인 한국토지주택공사에 수용되어 덕수장씨 사람들의 생활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는데, 현재는 철산주공12~13단지 등에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일가들은 주로 서울의 개봉동과 오류동, 독산동 등에 거주하고 있다.
철산동 개발계획으로 일가 중 몇몇은 철산중심상업지구를 비롯한 주변에 건물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를 종자돈으로 삼아 집안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개발 당시 비교적 보상이 골고루 이루어져 문중 공동 재산을 조성했는데, 이것을 토대로 장학 사업 등을 활발히 펼쳐 후손들의 이주율이 낮다. 이 때문에 지역의 급격한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이 지역에 남아 사당을 지키고 시제를 계속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철산리 덕수장씨 시제는 선조를 모신 묘와 생활공간이 한 지역에 공존하던 농경 사회의 관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전통의 문화유산인 시제를 현대 산업 사회 도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전통의 보존을 넘어 우리가 딛고 사는 이 땅에 새겨진 먼 옛날부터의 흔적을 다시금 되새기게 해주는 고결한 의식에 참여하는 것과도 같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