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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빛이 된 소하리 노동 야학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A020105
지역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설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학

설월리에서는 1927년에 서면공립보통학교[현 서면초등학교]가 개교하여 근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교육이 필요한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청소년들을 비롯해 일반 성인들 중에도 문맹자가 많았다. 1920~1930년대에 걸쳐 광명 지역에서는 문맹 퇴치를 위한 계몽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이는 당시 사회의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소하리에서 무학자들을 가르치다]

1928년 1월 7일자 『동아일보』는 ‘서면 소하리의 노동야학’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어 소하리 야학의 실태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학자가 없어서 또는 학령·연령 초과 등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배우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문명 퇴치 운동의 한 차원으로 시흥군 서면 소하리[오리동 지역]에서 윤의병(尹宜炳) ·이순구(李舜九)·이병대(李丙大)·이범규(李範圭) 외 여러 명의 청년들이 이곳 유지 이연철(李淵哲)의 후원을 얻어 설립하였다. 가옥[지하실]을 건축한 후 1927년 11월 중순부터 노동야학회를 개최하고 20여 명의 무학자를 모집하여 교수하여 오다가 기후 관계로 동리 유지 김흥출(金興出)의 집을 빌려서 다시 노동 야학 운영을 계속하였다. 교수 과목은 조선정음(朝鮮正音)·한문·산술·상용어(常用語) 등이었으며, 윤의병·이순구·이병대·이범규 등 네 명의 청년이 교사로 이들을 가르쳤다.”

1928년이라면 서면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된 이듬해이다. 서면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는 데 물질적·정신적으로 막대한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연철 씨가 초등 교육 외에 무학자들을 모아 가르치는 야학을 후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한 교사 중에 윤의병은 배재고등보통학교 출신으로 서면 3·1만세 운동을 주도한 엘리트였다. 암울한 식민지 백성으로서 교육만이 희망이라는 데 뜻을 둔 아름다운 만남이었다.

이러한 문맹 퇴치를 위한 계몽 운동은 1930년대에도 이어졌다. 『동아일보』가 주도했던 ‘브나로드운동’의 일환으로 역시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에서 문맹 퇴치 관련 계몽 운동이 행해졌던 것이다. 이 상황을 『동아일보』 1932년 8월 23일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5세 미만의 아동들이 낮에는 일하고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강습을 받았는데 반수 정도가 문자를 해독할 줄 알았으며. 참여 인원이 한때는 200여 명이 넘었다.”

[계몽 운동은 또 다른 독립 운동]

3·1만세 운동이 일어난 뒤 우리 독립 운동의 방향은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1920년대에는 노동 운동·문화 운동의 틀 속에서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졌는데, 여기에는 뜻있는 청년들의 농촌 계몽 활동이 근간을 이루었다. 이 같은 계몽 운동이 시흥군 내에서 어느 지역 못지않게 활성화된 지역이 소하리였다. 소하리는 광명 지역에서도 가장 많은 3·1독립 만세 운동가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소하리 야학은 당시 소하리 주민들의 높은 교육열과 주민 의식의 성숙도를 시사하고 있다. 문맹에서 벗어나자는 열망은 일찍부터 소하리에 근대적인 학교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최초의 공립학교인 서면공립보통학교가 면민들의 자발적인 기부와 참여로 개교했고, 만세 운동의 중심인물들 중에 소하리 출신이 다수를 차지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1920년대 이후 시흥군 서면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독립 운동으로서 계몽 운동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지역 정서가 야학에 대한 높은 참여 열기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본래 설월리는 조선시대부터 광명시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옛 시흥군 서면의 행정 중심지로 번성했던 소하리의 대표적인 마을이었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설월리는 교통의 요지, 서면 행정 중심지로서 높은 교육열 등 성숙한 주민 의식과 더불어 광명 지역의 중심지로서 그 전통을 더해 갔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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