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A010204 |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설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학 |
[신목에 띠 두르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다]
도당(禱堂)은 수호신을 제사하는 단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굿이 개인의 무병장수나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해 행해지는 것과 달리 도당굿은 신목(神木)인 소나무에 띠를 두르고 제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굿판이다. 마을 전체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광명시 소하2동 설월리 마을에서는 이웃한 오리동, 영당말 주민들과 함께 매해 음력 7월 1일 마을 축제이기도 한 도당고사를 지냈다.
고사는 영당말에 있는 익녕군파 선현 묘와 현대아파트 사이 능선에서 현대아파트 인근에 있던 아름드리 소나무 몇 그루를 신목으로 삼아 열렸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도당굿이 생긴 후부터 구름산 산줄기에 있는 도당고개에서 제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까지 성대하게 치러지던 도당굿은 세월의 변화와 함께 점차 그 규모가 축소되면서 명맥만 유지되던 중, 지난 1989년 이 일대가 구획 정리되면서 제당 터가 파손된 뒤 1992년부터는 도당고사마저 중단되었다.
[추렴한 돈으로 도당굿을 준비하다]
설월리와 오리동, 영당말 주민들이 함께 지냈던 도당굿은 세 마을의 마을 회의에서 굿을 준비하는 논의를 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회의는 주로 마을 이장들이 주재하는데, 당주를 선정하고, 굿에 쓸 소와 기타 물건을 추렴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다음에는 덕망이 높고 깨끗한 사람 중에서 당주를 선정했다. 설순금[1921년생] 씨에 따르면 당주는 그 해 아기가 태어나지 않은 깨끗한 집에서 나왔다고 했다.
“애기 안 낳고 깨끗한 집에 차례가 가. 부정하지 않은 집에서 맡아서 해.”
이렇게 당주로 선정된 사람은 자기 집 대문 앞에 황토 세 무더기를 양쪽으로 놓고 대문에 인줄을 매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하는 표시를 했다. 그리고 도당굿에 사용할 물건을 구입하고 돈이나 쌀을 추렴하는 일을 맡았다. 가가호호 방문하여 쌀과 돈을 걷어서 떡을 하고 제상에 놓을 조리술을 빚기도 했다. 또 소도 사는데, 특히 소는 누렇고 크고 좋은 놈으로 구입해서 머리는 제상에 놓고, 쇠고기는 각 가정에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소는 1970년대까지 잡았으나 그 이후에는 소머리만 사서 굿상을 차렸다고 한다.
김옥섬[1936년생] 씨도 도당굿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전에 산고사 지내는 거지요. 대동 가구마다 돈 걷고 쌀 걷고 해 가지고 그거 가지고. [도당 터는] 대머리산이 됐어요. 예전엔 도당산인데 지금은 다 밀어 버려서 대머리산이라고 해요. 나무도 있었는데 다 베어 버리고 없어요. 터도 안 해 놓고 지금은 없어. 7월에 소를 잡아요. 소 잡는 거는 동네 사람들이 다 추렴을 했어요. 소를 사 와서 고기들 먹고, 제사 지내고 그러는 거죠. 당주가 따로 있어요. 그 해 정결한 집, 깨끗하고 아무 부정이 없는 집에서 차려서 가지고 돌아가면서. 저 작은말 사람 다 가고 여기 동네 사람 다 올라오라고. 가는 사람은 가고. 저는 안 갔어요. 음식 한 거 대동 사람들 잡숫고 떡들 나눠 먹고 그랬지요.”
김정관[1932년생] 씨 역시 도당굿 하기 전에 소 잡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작은마을[오리동]하고 설월리 동네하고 소를 한 마리 잡아요. 집집마다 다 한 근 씩 잘라서 다 나눠요. 저 작은말 뒷산, 거기다 도당을 만들어 가지고 전부 쇠머리 갖다 놓고 제사 지내고 그랬지요. 소는 잡아 고기는 나누고 머리는 도당고사 지내고. 동네 당주가 있어서 재계하고 목욕하고 그 사람들이 제사 지내고 거기에 또 도당할아버지가 따로 있어서 그 분이 같이 가서 제사지내고, 동네 사람들은 12시 넘으면 제사 지내고 거기서 악써요. 도당고사 잡수러 오시라고 산에서 악을 쓰죠, 올라오라고.”
이렇듯 세 마을의 도당굿 때는 소를 잡아서 제사에 올릴 산적거리와 머리는 놔두고 나머지 고기는 마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고 한다. 설순금 씨는 만신들이 굿을 할 때 직접 가서 보고 절을 한 뒤 돈 만 원을 내놓기도 했단다. “무당들이 맡아 갖고 하다가 없어졌어. 높은 사람들이 많이 와. 소를 잡아서 고기를 150호 모두에게 한 근씩 나눠 주고 머리는 고사지내. 적거리[산적거리]는 떼어 놓고. 그 고기로 국을 끓이면, 미역을 한 양재기 넣고 솥에 끓이면 너무 맛있어. 나중에는 반 근씩. 인구가 많으니까, 반 근씩 차례 오면 집에서 또 고사 지내. 터주가리 떡은 또 따로 쪘어. 7월인가에 했어.”
[마을 축제 - 떡과 고기를 나눠 먹다]
세 마을이 함께 지내던 도당굿은 다른 경기도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대체로 비슷한 절차로 진행됐다. 음력 7월 1일 저녁 만신·당주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도당 터로 올라간다. 날이 어두워질 때 산에 올라 자정이 넘어서 밤늦게 내려온다. 도당굿이 진행되는 동안 무당은 마을 사람들에게 신령의 축복과 축농에 관한 말을 전한 다음 신령을 돌려보내면 굿판이 끝나게 된다.
소하2동에서는 도당굿 당일 목욕재계한 후 갓을 챙겨 쓴 주관자가 “원로들 오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면, 굿을 준비하는 봉사자들이 미리 준비한 소의 머리고기와 떡 등을 구경 온 많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때 고기와 떡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마을 어린이들이 소란을 떨곤 했다는 최문락[1939년생] 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함께 빌고 함께 먹었던 도당굿에 대한 추억은 설월리 사람들의 공통된 기억인 듯했다. 함께하는 정과 나눔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관 씨 역시 도당굿은 저녁에 지내는데, 먼저 가는 사람은 구경하고 늦게 가는 사람은 시간 맞춰 가서 음식을 얻어먹었다고 한다. “떡하고 고기, 쇠머리 다 쪼개서 거기 온 사람 다 노나배기 하죠[나누지요]. 열두 시 자정 되면 거의 끝나요. 터는 저 산인데요. 지금 그 밑으로 다 아파트 짓잖아요. 그 도당도 없어져 버렸어요. 나무가 아주 많았어요. 오래 돼 가지고 고목도 있었어요. 그게 다 없어졌어요. 아파트 짓는 바람에…….”
[도당굿, 공연 예술로 살아나다]
도당제가 중단된 것을 안타까워하는 주민들은 도당굿복원위원회를 결성하여 예전처럼 이 마을 저 마을에서 교대로 제를 지내는 형식으로 도당굿을 민속놀이로서 복원하기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꾸준한 노력 끝에 공연 예술로 전승된 도당놀이가 1986년 이후 최근 2005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공연된 바 있다.
1986년 8월 소하동 주민 120명이 참가하여 만든 대규모 광명놀이단은 도당굿을 도당놀이의 형식으로 재구성해서 그 해 9월 11일 광명시청 앞 잔디구장에서 시연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 12일부터 13일까지 수원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5회 경기도 민속예술공연대회에 참가해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소하동 사람 중 도당놀이에 참석한 사람들은 용대기 역의 김만진[35세]과 무녀 역의 김선화[82세]·원이쁜[55세], 제관 역의 김화중[71세]·김석환[66세]·박창래[63세], 종쇠 역의 이병현[64세], 상장고 역의 임정동[67세], 징의 최금석[62세], 각시 역의 박봉희[67세], 소고의 김건성[62세], 아낙네 역의 안순길[59세]·김상순[55세]·안순남[65세]·김금례[58세]·신석희[35세]·안점례[62세]·강소금[62세]·정진예[50세]·김재금[65세]·김영순[49세]·김상란[61세]·이성림[59세]·이옥규[56세]·유용심[59세]·김태분[53세]·이흥숙[47세]·박유식[49세]·이순자[62세]·이순임[51세] 등이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