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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A010201
지역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설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학

오리(梧里)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재상인 이원익(李元翼)[1547~1634]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로, 태종의 아들인 익녕군 이치(李袳)의 5세손이다. 1569년(선조 2) 관직에 나아가 임진왜란을 전후한 격동기에 선조광해군, 인조 등 세 왕을 섬겼다. 이원익은 청백리(淸白吏) ‘오리 대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청백리는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근검·도덕·경효·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 상으로, 왕의 재가를 얻어 의정부에서 뽑아 관리에게 주어진 호칭이다. 이원익황희, 맹사성과 함께 조선의 3대 청백리로 꼽힌다.

[오리 대감의 정신이 깃든 곳 - 충현박물관]

구름산 아래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1085-16번지에는 아파트단지와 도로에 둘러싸인 전통 가옥이 들어서 있다. 울창한 푸른 나무와 식물들이 회색의 도심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있는 이곳은 오리 이원익 종가 안에 있는 충현박물관이다. 푸른 것은 나무들뿐만이 아니다. 청렴한 재상으로 이름난 오리 이원익 선생의 정신도 푸르기만 하다. 푸른 나무와 푸른 정신이 있는 곳, 오리 종택충현박물관으로 가 보자.

충현박물관오리 이원익의 13대 종손인 이승규 박사와 부인 함금자 여사가 선조의 뜻을 계승하고 알리기 위해 종가 일부를 개조해 지난 2003년 6월 개관하였다. 종가가 직접 운영하는 종가 박물관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충현박물관은 숲과 나무에 둘러싸여 주변의 아파트단지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그 안의 각 공간에는 400여 년에 이르는 오리 이원익과 그 후손들의 삶과 정신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전시관과 관감당, 오리영우, 충현서원 터, 삼상대, 풍욕대, 가족 묘소 등이 그것이다.

전주이씨 이원익의 종손이 지키고 보호해 온 곳을 구석구석 둘러보기로 하자. 먼저 정문을 지나면 2층 건물의 박물관이 있다. 1층에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종가에서 사용했던 제기와 민속 생활품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이원익의 영정과 친필 등 이원익과 관련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2층 전시물 중에는 이원익이 연풍현의 수령으로 부임한 손자 이수약(李守約)에게 써 준 글도 보인다. 글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오리 선생의 지혜와 자세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다음의 8가지 당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 바람직한 정치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 준다.

1.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몸을 닦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2. 천하의 실정을 안 후에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

3. 일에 다다라서는 포악함과 성냄을 경계하고 서서히 일의 실정을 파악하라.

4. 사람을 다스림에 있어서 상벌이 있을 수가 없으니, 착한 자는 상을 주라. 상을 주었으니 오랫동안 잊지 말아야 한다. 악한 자는 벌을 주어야 한다. 벌을 주었으니 시일이 지나면 [나쁜 일에 대해서] 생각지 말라.

5. 하나의 이익을 일으키는 것이 하나의 폐단을 제거하는 것만 못하고, 한 일을 내는 것이 한 일을 더는 것만 못하다.

6. 읍중에 일이 있거든 노련한 관리와 연로한 인민에게 널리 물어서 인정에 합하기를 힘써야 하고, 남에게 거만을 부리고 스스로 민심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7. 백성은 마땅히 어루만져 돌봐야 하며, 관속을 대하는 것도 각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

8. 모든 일은 때에 따라 마음을 다해야 한다.

[사대부의 검소하고 단아한 주거 공간, 오리 대감 종가]

충현박물관 맞은편에는 이원익 종가의 종택이 있다.

이승규, 이종민, 이장호 3대 직계 손의 문패가 달려 있는 이 집은 1998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0호로 지정된 곳으로, 1960년대 말까지 이원익의 후손이 대대로 거주하던 곳이다. 종택은 관감당과 안채, 행랑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들보에는 ‘용 관감당건익년정사윤이월육일미시입주상량 귀(龍 觀感堂建翌年丁巳閏二月六日未時立柱上樑 龜)’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관감당을 세운 이듬해 정사년[1917] 윤2월 6일 미시[오후 1~3시]에 기둥을 세우고 동량을 올렸다”는 뜻이다.

관감당은 1630년(인조 8) 인조가 경기감사에게 명하여 이원익에게 지어 준 5칸짜리 집인데,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94년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다시 어느 시기에 허물어졌다가 1917년 10세손 이연철(李淵哲)이 다시 중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감당의 사액은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오리 이원익을 백성이 보고 느껴야 한다’는 뜻에서 인조가 내린 것이다. 이원익관감당에서 노년의 4년을 거처하다가 향년 88세로 작고하였다.

관감당 앞에는 수령이 400여 년 된 측백나무 밑으로 평평한 바위가 있다. 이원익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 하여 탄금암(彈琴岩)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바위에 앉아 있노라면 측백나무 사이를 오가는 바람 소리가 거문고 소리인 듯하다.

관감당 위로 이원익의 영정을 모신 ‘오리 이원익 영우(梧里 李元翼 影宇)’가 있다. 이곳에는 「호성공신도상 이원익 영정」[보물 제1435호]이 봉안되어 있다.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여 피난했던 공적이 인정되어 호성공신으로 녹훈되었을 때 그려진 영정이다.

오리 이원익 영우 뒤로 가면 충현서원 터가 있다. 서원의 시초는 이원익이 사망한 후 1658년(효종 9)에 그를 배향하는 삼현사가 세워지면서부터이다. 삼현사는 강감찬, 서견, 이원익 삼현을 제사한 곳이었다. 이후 충현사로 불리다가 1676년(숙종 2) 숙종이 직접 충현서원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충현서원 편액은 충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충현서원 터 위로는 삼상대(三相臺)가 있다. 삼상은 일반적으로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의 삼정승을 일컫는다. 삼정승을 두루 거친 이원익 선생의 치적을 기려 후손과 문인들이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상대 너른 마루에 앉아 서원의 문인들이 함께 모여 토론을 나누었을 법하다.

삼상대를 지나 숲길을 지나오면 풍욕대(風浴坮)가 있다. 풍욕대는 ‘바람에 목욕을 한다’라는 의미이다. 여름이면 구름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한낮에도 시원한 곳이다. 누가 건립한 것인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위에 서서 바람으로 목욕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

풍욕대 계단을 내려와 오른쪽으로 가면 이원익의 가족묘가 있다. 가는 길에 보이는 묘는 이원익의 숙부인 이억령의 묘소이다. 이 묘를 지나 계단 옆으로는 이원익의 형인 이원보 묘소가 있고, 그 위로 아버지 함천군 이억재의 부부 묘가 있다.

도심 속에 살다가 푸른 공기가 그리울 때 충현박물관에 가 보자, 충현박물관으로 가 보면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푸른 정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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