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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527
한자 李潑
영어음역 Yi Bal
이칭/별칭 경함(景涵),동암(東巖),북산(北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지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44년연표보기
몰년 1589년연표보기
본관 광산
대표관직 사간원대사간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巖)·북산(北山). 증조할아버지는 상의원정(尙衣院正)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낸 이달선(李達善)이고, 할아버지는 홍문관박사를 지낸 이공인(李公仁)이며, 아버지는 승정원도승지와 이조참판·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한 이중호(李仲虎)이다. 부인은 박이(朴苡)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발(李潑)[1544~1589]은 1573년(선조 6) 알성 문과에 장원하였으며 이듬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이조정랑과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1579년(선조 12) 응교에서 1581년(선조 14) 홍문관전한을 거쳐 1583년(선조 16) 홍문관부제학을 지내다가 이듬해 사간원대사간을 역임하였다. 김근공(金謹恭)과 민순(閔純)에게 수학하였으며, 홍가신(洪可臣)·최영경(崔永慶)·김우옹(金宇顒)·허당(許鐺)·박의(朴宜)·윤기신(尹起莘) 등과 교유하였다.

이발은 동인의 거두로, 서인의 거두인 정철(鄭澈)과 대립이 심하였으며, 정철의 처벌에 관한 문제가 대두될 당시 강경파를 이끌어 북인의 수령이 되었다. 이 일로 동인과 서인의 분당적 요소를 화해하려 하였던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과 교분이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584년(선조 17) 이이가 세상을 떠난 뒤 서인의 거두 심의겸(沈義謙)을 탄핵하고 파직시키며 동인의 거두로서 동인 정권을 유지시키지만,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에서 모반에 가담하였다 하여 모진 고문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82세의 노모와 8세의 아들도 형벌 끝에 죽음을 당하였는데, 노모는 형벌이 너무 지나치다며 꾸짖었고 정여립 모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일의 전말에 대하여 승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발은 인조반정 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상소로 신원되었다.

[학문과 사상]

이발은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지치주의는 유교로 정치와 백성의 교화를 근본을 삼아야 하며, 이에 입각한 왕도 정치의 실현과 기강의 질서 등을 이야기하는 정치사상이다. 또한 성리학이 수용된 이후 조선 왕도 정치의 이념에 정착되면서 나타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묘소]

묘소는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일부 기록에 묘소가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비석에 병조판서를 지내고 부인의 성이 김씨로 기록되어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발이 병조판서를 지낸 기록이 없고 장인은 박이로 동일인이 아님을 알려 준다. 이와 관련하여 광산이씨 문중에서는 같은 동인이며 이발의 신원을 상소한 이원익이발이 역모에 몰린 이후 소하동에 묘소를 쓰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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