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석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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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광명문화원에서 경기도 광명시 학온동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한 동지(洞誌). 『학온동지(鶴溫洞誌)』는 독자적인 발간물이라기보다 광명문화원에서 매년 발간하는 잡지인 『광명문화』 6호의 형태로 1999년에 간행한 것으로, 광명시와 경기문화재단의 ‘역사기록 문화창달사업’의 지원을 받은 것이다. 1책으로, 표제는 ‘학온동지(鶴溫洞誌)’이다. 앞부분에 광명문화원장 정원조의 간행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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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시 가학동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이 형성되기 전부터 샘물이 잘 나오고 가재가 많았으므로 가재골이라 하였다. 가재골은 본래 공석골에 속했던 마을로 광복 후 공석골에 살던 창녕성씨가 분가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1964년 1월 1일 시흥군의 행정구역을 확장하면서 공석골·뒷골과 함께 가학2리에 속하였고,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따라 경기도 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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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시에 속하는 법정동. 가학동은 자연마을인 가골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마을 지형이 학이 날개를 펼친 모양과 같아 붙인 지명이라는 설과, 학이 마을을 둘러싼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한다. 가골은 달리 가곡(駕谷), 원가학(元駕鶴)으로도 불린다. 가학동은 고려시대 금천현(衿川縣)에 속했던 지역으로, 금천현은 조선 건국 후인 1414년(태종 14) 과천(果川)을 병합하여 금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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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벌말에 있는 다리. 가학1교는 가학동에서 따온 이름으로 보인다. 가학1교가 있는 벌말은 광명시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원래 현재의 광명남부교회[벌말교회]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m 지점의 허허벌판에 마을이 생겼다고 하여 벌말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가학동 가골[원가학]과 동창골 사이를 능골이라 불렀는데 이곳이 학(鶴)의 서식처였다고 한다.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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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 지역은 남북으로 가학산과 서독산, 구름산, 도덕산이 길게 시의 중앙을 가로지르며 형성된 지역이다. 이 산들을 중심으로 광명동과 철산동, 하안동, 소하동, 일직동, 가학동, 노온사동에 속한 자연마을에 깃들여 많은 사람들이 누대에 걸쳐 살아왔다. 그러나 도덕산 자락의 철산동과 하안동, 광명동 지역은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급격하게 진행된 도시화로 본 모습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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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시 가학동에 있는 자연마을. 조선 명종 대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성몽규(成夢奎)가 살면서 군자감에서 필요로 하는 공물과 세금을 받아들이고 출납하였던 곳이어서 공세동이라 하였다. 이후 발음이 변하여 공석이 되었다. 공석골은 조선 말기 시흥군 남면 유등리(柳等里)에 속하였고, 1914년 경기도 시흥군 서면 가학리에 속하였다. 1964년 경기도 시흥군 서면 가학3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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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시 가학동에 있는 자연마을. 공석골 뒤에 있는 마을이므로 뒷골이라 하였다. 달리 둔전현(屯田峴)이라고도 하였다. 뒷골은 공석골에 살던 창녕성씨가 번성하여 분가하면서 형성된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시흥군 서면 유등리에 속하였고, 1914년 시흥군 서면 가학리에 속하였다. 1964년 시흥군 서면 가학3리에 속하였고, 1981년 광명시 승격으로 광명시 가학동에 속하였다. 행정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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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시에서 동성동본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 집성촌은 우리나라 전통 사회의 한 특징으로 동성동본의 성씨 집단이 대대로 함께 모여 사는 촌락을 말한다. 집성촌이 형성된 시기는 삼국시대 또는 고려시대로 보기도 하지만, 조선 전기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17세기 이후에 정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집성촌의 형성은 가족 제도와 친족의 범위, 혼인, 상속 제도와 관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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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보를 시조로 하고 성춘영을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광명시 세거성씨. 창녕성씨는 창녕성씨 문중의 족보인 『계축보(癸丑譜)』에 따르면 성인보(成仁輔)를 시조로 하며, 묘소는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맥산 기슭에 있다. 성인보의 3세손 성공필(成公弼)·성한필(成漢弼) 대에 크게 두 계통으로 갈라졌고, 6세손에 이르러 성기(成紀)를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를 포함하여 1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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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시 가학동·노온사동을 관할하는 행정동. 가학동의 ‘학’자와 노온사동의 ‘온’자를 따서 학온동이라 하였다. 학온동은 고려시대 금천현(衿川縣)에 속했던 지역으로, 금천현은 조선 건국 후인 1414년(태종 14) 과천(果川)을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이 되었다가 두 달 뒤 과천을 다시 설치하면서 금천과 양천(陽川)을 병합해 금양현(衿陽縣)이 되었고, 1416년(태종 16)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