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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이 들어서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A020301
한자 起亞自動車所下里工場-
지역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설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학

[소하리공장 건설하고 종합 자동차 메이커로 도약하다]

기아산업은 1970년 11월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에 국내 최초의 대단위 종합 자동차 공장 건설에 착수하였다. 소하리공장은 영등포와 부산, 시흥에 이은 네 번째 공장인데, 엄격한 의미에서 소하리공장은 자동차 생산을 위한 최초의 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기아산업은 창업 이래 영등포, 부산, 시흥 공장을 거치면서 약 30년 동안 자전거와 2륜 오토바이, 3륜 자동차 등을 꾸준히 생산하여 한국 자동차 공업을 선도해 왔으나, 본격적으로 자동차 생산에 뛰어든 시점은 소하리공장이 준공된 이후로 볼 수 있다.

착공 당시 소하리공장의 부지 면적은 총 22만 9078평[0.76㎢]이었다. 1970년 7월 경부고속국도가 개통되면서 자동차 시대가 열릴 것을 예측한 기아산업은 비밀리에 시흥공장 맞은편, 곧 시흥군 서면 781번지 일대의 땅을 매입하기 시작해 1967년에 10만 7025평[0.35㎢], 1969년 8만 9,675평[0.30㎢], 이어서 1970년 3만 2,378평[0.11㎢]을 매입하는 등 3년 동안 총 22만 9078평을 매입하였다. 그리고 2년 8개월 동안의 대 역사 끝에 1973년 6월 1단계로 준공된 9개 단위 공장은 연건평이 1만 5329평[0.05㎢]이고 이에 투입된 공사비는 100억 원이 넘었다.

기아산업은 소하리공장의 준공과 더불어 1973년 7월 최초의 국산 엔진[VA가솔린1986㏄]을 개발하고 1974년 10월에는 마침내 기아 최초의 승용차인 브리사S-1000을 생산하여 종합 자동차 메이커로 도약하였다.

[그린벨트에 지어진 기아의 집]

현재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 자리는 설월리 주민들이 농사를 짓던 농지로서, 원래 ‘멍석뜰’이라고 불렸던 논자리라고 한다. 당시 설월리 ‘기아의 집[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 기숙사]’을 지으며 파헤친 산의 흙을 퍼다가 부지를 메워서 공장을 건축했다고 한다.

1971년 개발 제한 구역에 포함된 설월리에 ‘기아의 집’이 들어오게 된 것은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에 시찰 왔던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설월리와 달리 마을 오른쪽으로 구획되어 반듯하게 지어진 주택 부지가 보이는데 그것이 옛 기아의 집이다.

최문락[1939년생] 씨에 따르면,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 부지는 원래 설월리가 속한 소하2동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소하1동이 되었다고 한다. 최문락 씨는 당시 그 땅을 기아자동차에 평당 1700원에서 1800원을 받고 팔았다고 한다. 1960년대 중반 서울특별시에 의해 광명동 지역이 개발될 당시 땅값이 평당 180~230원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후하게 땅값을 쳐서 받은 셈이라고 한다.

[바다 같던 설월리 논들이 없어졌지]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이 광명 지역, 특히 설월리 일원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우선 많은 설월리 주민들이 그들의 농토를 소하리공장 부지로 매매했고, 상당수의 주민들이 기아자동차에 입사해 직장을 얻었다. 물론 설월리 주변 소하2동 일대의 상권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김옥섬[1936년생] 씨는 아들 형제가 기아자동차에 취직한 뒤로 집안 형편이 농사만 지을 때보다는 나아졌다고 말했다.

“우리 아들 형제가 기아자동차에 취업해서 다녀요. 막내아들하고, 지금도 둘째 아들하고. 기아산업에 들어가서. 그전 농사지을 때보다는 낫죠.”

하지만 김정관[1932년생] 씨는 기아자동차 공장이 들어섰다고 해도 마을에서 받은 혜택은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고 말했다.

“농토는 기아한테 다 팔아먹고 포기하고. 취직은 우선적으로 많이 들어갔어요……. 명절 때 초청하고, 입사 지원자에 우선권을 주었지. 본래 공장 부지를 매입할 때에 설월리 사람은 우선 써 주겠다는 각서를 받았을 거로 생각돼요……. 동네에 해 준 거는 별로 없고. 그 당시 건립한 기아주택의 수도로 들어가는 물을 혜택 받았을 정도이지…… 수도 들어오는 거 협조 받았지. 기아주택은 기아 사람만 들어오게 되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팔아먹는 바람에 딴 사람이 살게 된 거요”

설순금[1921년생] 씨는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이 들어오면서 바다처럼 넓디넓던 설월리 논들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했다.

“그 바다 같던 설월리 논들이 없어졌지. 요즘 집만 있어……. 기아차가 들어오고 설월리 사람들 부자 되었지.”

[기아가 단독으로 놓은 다리, 기아대교]

시흥 쪽에서 소하리로 진입하려면 안양천을 건너야 한다. 기아산업은 소하리공장 건설에 착수하면서 시흥과 소하리를 잇는 다리를 건설하겠다는 행정 당국의 약속을 받았으나 안양천을 사이에 둔 서울시와 경기도 양측이 서로 책임을 미루면서 다리 건설이 지연되고 있었다. 결국 기아산업에서 자체적으로 2억 원의 경비를 부담하여 단독으로 공사를 시작했고, 1973년 7월 시흥과 소하리를 연결하는 기아대교를 완공할 수 있었다.

[정보제공]

  • •  설순금(여, 1921년생, 소하2동 설월리 주민)
  • •  김정관(남, 1932년생, 소하2동 설월리 주민)
  • •  김옥섬(여, 1936년생, 소하2동 설월리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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