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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008
한자 光明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민성혜

광명리 사람들 이야기는 광명시 개청의 모태가 된 광명동 지역과 관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었다. 광명리의 도시개발과 그에 따른 변화는 이후 전개되는 광명의 여러 지역의 도시화의 기본 모델이기 때문이다.

광명시의 도시화는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한 자연마을이 조금씩 확대되면서 서서히 진행된 것이 아니다. 서울특별시의 주택과 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서울특별시의 택지개발계획에 의해 그리고 수도권 위성 도시로 조성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 광명지역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으며 급속히 변화해 온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광명시 뿐 아니라 수도권의 여러 도시에서도 보이는 현상이기도 하다.

광명의 도시화는 국가주도의 주택과 인구 분산 정책의 흐름과 함께하였으며, 도시가 확대되거나 반대로 개발제한구역이라는 제약이 공존하는 형태를 띄게 되었다. 그 결과는 서울과 인접한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 지역의 도시화ㆍ편의시설 집중과 소하동, 학온동, 옥길동의 낙후라는 지역 간의 격차로 나타나게 되었다.

최근 소하동, 학온동, 옥길동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에서 해제되고, 보금자리주택정책이 발표되면서 뒤늦게 도시개발의 물결에 합류하게 될 예정이다. 도시개발이 이 지역 주민들의 오랜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하고 지역 간 불균형을 바로 잡는데 기여하리라는 기대를 하면서도, 획일적인 아파트단지의 건설이 광명의 역사와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옛 지역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지게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또한 존재한다. 실제로 1970년 대 광명 택지개발지구로 개발되고 자연마을이 자연스레 폐동되면서 광명동의 옛 자취는 사라져버렸고, 이주해 온 사람들은 광명을 머물렀다 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떠나갔다. 남아있게 된 사람들도 광명을 제 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자리 잡기까지 인위적인 도시화로 인해 발생한 문제-소속감, 교육시설, 기반시설, 수해와 주택, 복지 등- 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서면의 중심지가 소하리에서 광명리로 이동하다]

광명시는 1960년 대 후반까지만 해도 약 13,000명이 살고 있던 면 단위의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시 승격 이전의 행정구역명은 경기도 시흥군 서면이었고, 현재의 광명동가학동, 노온사동에 해당하는 지역은 시흥군 서면이 아닌 시흥군 남면이었다. 즉, 1914년 이전까지의 시흥군 서면은 철산리, 하안리, 소하리, 일직리였고, 시흥군 남면은 광명리, 가학리, 노온사동이었다. 그것이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시흥군 남면, 군내면 박달리가 시흥군 서면과 통합되었고, 통합명은 시흥군 서면으로 결정되었다. 이때 면사무소의 소재지가 현재의 소하2동주민센터가 있는 설월리로 결정되었다. 이후 설월리서면의 중심지가 된 것으로 보인다.

설월리 지역은 면소재지이면서 서울과 안양에 생활권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버스 노선이 가장 먼저 개통되었다. 주민들의 문화적 욕구도 커서 1950년대에 ‘가리대소년극단’과 같은 연극 단체가 결성되었고, 서천극장이 개관하여 번성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설월리가 포함된 소하리 지역은 서면의 중심지였지만, 1970년대 이후에도 소하리 지역이 서면의 중심지로서 도시화를 주도하였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서울이 도시화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자 인구 과밀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행정 구역 조정을 실시하면서 서울시와 가까운 경기도 12개 면 90개 이(里)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시흥군 서면 철산리와 하안리는 1963년 8월 서울의 도시계획 구역이 크게 확장되면서 포함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광명 지역에는 1968년 5월 14일 건설부공고 제64호로 60만 단지라 불리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되는데, 60만 단지는 개봉1·2지구라고 하여 대한주택공사에 의해 일괄 개발된 광명리 와 개봉동 일대를 말한다. 그중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 일부가 개봉1지구에 해당되고,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개봉동이 개봉2지구에 해당되었다.

반면 1971년 12월 광명리·철산리 일부와 하안리·소하리·가학리·노온사리 등 서면 지역의 대부분은 개발 제한 구역으로 설정되었다. 개발 제한 구역이 설정되면 해당 지역에서는 건축물의 신축·증축, 용도 변경, 토지의 형질 변경 및 토지 분할 등과 같은 지역 주민의 재산권 행사에 제한이 가해지게 된다. 개발 제한 구역으로 인해 소하리 지역이 급격히 쇠퇴하고, 광명의 중심지는 택지 개발과 함께 도시화가 시작된 광명리 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광명리 지역이 서면의 중심지가 된 데에는 서울특별시의 도시개발계획이 직접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사업명이 개봉택지개발지구인 것처럼 광명리 지역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될 것이라는 소문도 무성했고, 서울특별시로 알고 이사 온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새로운 도시의 개발은 가족을 이루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야하는 젊은이들이 자연스럽게 광명으로 몰려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구획정리사업과 관련된 기록물들은 광명시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수해로 인해 모두 유실되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토지 구획 정리와 관련한 광명 지역의 개발 풍경은 광명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토박이나 타지에서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주해 온 주민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들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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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리 사람들의 그때 그 시절 이야기]

광명리의 토박이와 1970년대 택지 개발이 되면서 광명리로 이주해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신도시로 변화하는 1970년대 초반 광명 지역의 모습을 돌아보기로 하자.

1. 안병식 씨 이야기

광명5동의 토박이인 안병식 씨[1947년 생]는 광명리의 대표적인 자연마을인 너부대의 토박이이다. 60만 단지 중 개봉1지구는 현재의 광명사거리 일대와 광명아파트[현 광명한진아파트]를 가리킨다. 개봉1지구에는 너부대 사람들의 땅이 거의 포함되었다고 한다. 빨리 팔지 않으면 빼앗긴다는 소문도 돌았기 때문에 당시 가격으로 평당 180원~200원, 더 버틴 사람들은 230원에 대한주택공사에 땅을 팔았다고 전했다. 당시 대토(代土)로 받은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지만, 돈으로 받은 사람들은 잘 안되었다고 한다.

광명아파트까지는 구획 정리로 개발된 것이지만, 너부대 쪽은 개인들이 땅을 사서 지은 집들이라고 하였다. 안병식 씨는 곧 군에 입대하였는데, 군 제대를 하고 나온 1~2년 사이에 논과 습지였던 광명리 일대가 대부분 택지로 변화하여 옛 동네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토박이인데도 기억을 더듬으며 집을 찾아가야 할 정도였다.

구획 정리가 되고 민영 주택이 들어서면서, 용돈벌이를 위해 향나무를 잘라 꺾꽂이를 해서 어느 정도 자라면 팔기도 했다. 나무를 사면서 심어 달라 부탁하면 대신 심어 주기도 했는데, 땅을 파보면 흙 속에서 벽돌과 자갈이 나오니 터 닦기가 엉망이었던 것 같다. 광명사거리 다리 위에는 파출소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김장을 하고 페인트칠도 하며 자발적인 방범대원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광명남초등학교 부근에는 천주교 묘지가 있었는데, 이 지역에도 무허가 판잣집이 많이 들어섰고, 밤사이에 한 채씩 지어지기도 하였다.

2. 이덕훈 씨 이야기

이덕훈[1940년 생] 씨는 충청남도 대천이 고향이다. 스무 살에 서울에 올라와 처음에는 서대문구 아현동에 살았다. 가족과 살 집을 구하러 다니다 1971년 신림동에서 12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렸다. 당시 서울에서 들어오던 버스의 종점은 광명사거리에 있었다. 서울의 개봉동으로 알고 들어온 곳은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8리로, 현재 광명1동이다. 당시 광명8리는 택지가 조성되어 집터와 축대가 세워져 있었고 한 필지 당 165.29㎡~198.35㎡[50~60평]씩 구획되어 있었다.

이덕훈 씨의 집은 집장사가 1971년도에 지어놓은 것을 산 것인데, 당시 집터는 3.3㎡ 당 1만 원 정도 했고, 165.29㎡ 땅의 슬레이트 지붕집은 150~200만 원 정도였었다. 이사 온 다음 날 비가 오더니 아랫동네에 물이 차버렸다. 이덕훈 씨의 집은 고지대라 비 피해가 없었지만, 목감천 변인 아랫동네는 이후에도 물난리를 여러 번 겪었다. 연탄보일러를 설치하고 주택의 지하실에는 연탄을 저장했기 때문에 물난리가 나면 연탄이 다 젖어서 뭉개져 버리곤 했다.

1972년도에만 해도 50여 채에 불과하던 집들이 1973년도가 되어 건축 붐이 일어나 단독 주택과 연립 주택이 뚝딱뚝딱 들어섰고 또 잘 팔렸다. 동네에는 브로크[블록시멘트벽돌] 만드는 공장이 생겼다. 이 지역에 사람들이 몰린 이유는 서울 근방이면서 교통이 좋고 서울 전화와 상수도를 사용하는 편리함, 그리고 집값이 근방에서 가장 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수요가 급증하자 한 달 만에 집을 뚝딱 지어서 파니, 날림이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었다.

집을 사려는 사람들은 개봉동에 있는 부동산에 들러 알아보곤 했다. 부동산에서 대절한 차를 타고 휙 올라와 버리면 번듯한 집들이 있으니 금방 계약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사와 보면 서울도 아닌, 그렇다고 평지도 아닌 산꼭대기이고 상수도 시설도 잘 되어 있지 않아 살면서 고생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상수도 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에 집을 지으려면 지하수를 파서 지하수가 나오는지를 확인해야 허가를 내주었는데, 빨리빨리 집을 짓느라 지하수를 파면서 허가를 내기도 했고 심한 경우에는 빈 우물을 파서 물을 부어 놓고 허가를 받아내는 일도 있었다. 이렇다보니 지하수가 잘 나오는 집에서 물을 얻어먹으며 생활하기도 했고, 물난리 후에는 그나마 있던 상수도가 터지는 일도 종종 있어서 이 지역은 ‘물’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광명1동의 옛 동네는 빌라로 재건축되면서 모습이 변했지만, 전체적인 마을의 형태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으며, 당시 지었던 집도 몇 채 정도는 남아 있다.

대한주택공사에 의해 구획 정리가 진행되고, 경기도 최초의 아파트로 알려진 광명아파트가 1970년 12월 준공되었다. 광명아파트는 곧 광명 지역의 대표적인 주거 단지가 되었다. 광명사거리에 인접해 교통이 좋고 시장이 가까웠으며 사립 유치원과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 당시로서는 최신 주거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젊은 층에 인기가 있었으며, 36.36㎡[11평]의 방 두 개, 화장실과 부엌, 연탄보일러를 사용하는 국민 주택 규모였지만,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 주로 살았다.

3. 이현숙 씨 이야기

이현숙[여, 1944년 생] 씨는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이 고향으로 서울 토박이이다. 서울특별시 중구 수하동, 지금의 을지로입구 하동관 곰탕집 옆에 있던 흥국생명 영업과에 근무하던 중 지인의 소개로 결혼하며 회사를 그만두었다. 당시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퇴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석유난로와 대형 에어컨을 만드는 회사에 다녔는데 회사가 고척동에 있었기 때문에 신혼집을 고척동에 마련하게 되었다. 고척동 집은 전원주택이었는데, 펌프 물을 사용했지만 물이 나빠서 아이를 키우는 데 좋지 않다고 하여 신길동, 면목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남편이 오류동의 우신알루미늄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광명리에 있는 광명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당시 잘 알려진 아파트로는 서울의 정릉과 마포, AID차관아파트 정도가 있었으니 아파트라는 집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고 경기도에서는 광명리광명아파트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살던 곳이 서울이고 언니들이 많아서 아파트에서의 삶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었다. 나는 깔끔하고 편리하고 세련된 생활에 대한 동경이 커서 주택보다는 아파트로 살 집을 결정하게 되었다.

광명아파트는 천 세대가 넘었으니 대규모 단지에 속했다. 또한 광명리가 서울로 편입된다는 소문이 계속 있었고, 전화나 상수도가 서울과 같은 조건에 교통도 좋아서 선택하게 되었다. 한편 아파트 생활은 시골에서 살던 노인들에게는 답답한 공간이어서 아파트에 살면 불편하다는 이야기도 많았다. 따라서 아파트에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시부모를 모시지 않게 되기도 했으니, 예나 지금이나 시부모 모시는 일이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당시 젊은 세대들이 아파트를 선호하는 데에는 그런 숨은 뜻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광명아파트는 1, 2차까지 미분양이었고 3차 분양 때 샀다. 1971년 4월부터 입주가 시작되었다. 온돌방이 두 개 있는 집은 120만 원이었고, 광명로 쪽 라인은 방이 두 개라도 하나는 난방이 안 되는 마루방이라 80만 원 정도였다. 나는 미분양 아파트를 82만 원에 사서 40만 원을 내고 나머지는 3개월에 8만원 씩 갚아 나갔다. 그래도 평수가 작았기 때문에 단독 주택을 사는 것보다는 쌌다. 당시는 관리비라는 개념이 없었고 개별적으로 연탄을 사서 쓰고 공동 비용으로 얼마 정도를 냈는데 얼마였는지는 기억이 없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기업이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수입이 좋은 편이었는데, 대기업 회사원들이 보통 2만 5천 원에서 3만 원 정도 받았고, 우리는 우신알루미늄으로 갈 때 5만 원 정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파출소장이 수준 안 맞는다고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광명아파트 사람이라면 사는 형편이 나았기 때문에 콧대가 높아서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곧 서울로 이사했다. 아이들의 교육이 제일 큰 문제였고, 해마다 드는 물난리도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사 간 곳은 현재 구로구 개봉2동 개봉성당 자리인데, 이 지역도 물난리에서 안심할만한 곳이 아니었다. 개봉동 지역도 물난리가 나서 지하실에 물이 다 차는 바람에 지하에 사는 사람들은 굉장한 피해를 입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고, 마침 남편의 사업도 번창하였기 때문에 강남구 대치동의 은마아파트로 이사했다. 현재는 광명시 철산4동의 재건축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이들은 다 자라 각자의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예전의 이웃이 살고 있는 광명 지역에서 사는 생활이 편안하다.

개봉택지개발지구는 중산층을 위한 주거 공간으로 조성된 곳이지만, 해마다 이어지는 수해와 열악한 교육 문제는 광명을 머무르는 곳이 아니라 기회만 되면 떠나는 곳으로 만들었다. 해마다 치르던 물난리 문제는 1990년대에 들어서야 배수펌프장을 설치하면서 해결되었다. 광명에 살던 사람들이 떠올리는 첫 번째 기억이 물난리인 것도 무리가 아니다.

1970년대 광명 지역의 학교는 1971년 개교한 광명초등학교와 1975년 광명초등학교에서 분리 개교한 광명남초등학교, 1976년 개교한 광명여자고등학교가 있었고, 중고등학교는 1972년 철산리에 개교한 광명중학교와 1975년 개교한 광명고등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이후 10년 간 유입되는 인구에 따라 늘어나는 학생들을 수용하기에는 학교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1980년까지도 광명초등학교는 76학급에 교실이 51개로 2부제 수업을 진행하였다. 한편 광명리의 학생들이 상급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철산리의 학교로 다녀야 했는데, 철산리는 광명 지역 중에서도 오지였고, 철산리와 광명리 간에는 서로 오가는 교통편도 없었다. 따라서 부모들은 광명로로 연결된 가까운 개봉동이나 좀 더 멀리 영등포 지역으로 자녀를 전학시키거나 아예 서울 지역으로 이사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지역 기반 시설의 부족으로 가까웠던 이웃이 떠나가는 문제는 광명 지역민에게 깊은 상처로 남겨지게 되었다.

한편, 새로운 주거지가 조성되자 개인들이 조합 주택을 결성해 이주해 오거나 회사에서 사원들을 위한 사원 주택을 짓기도 하였다. 공군 주택, 원호 주택들도 광명 지역에 지어지게 되었다. 1972년 철산1동에는 광복아파트가 준공되었다. 광복아파트는 원호처[현 국가보훈처]가 대한주택공사에 의뢰해 보상 차원에서 독립군, 6·25상이군, 월남상이군 등의 국가 유공자들에게 실비로 분양한 아파트였다.

다음은 지인들과 조합을 설립하고 택지를 구매하여 주택을 짓고 이주해 온 김행영 씨와 서면 시절부터 우편배달을 하며 광명의 도시화를 지켜본 장기상 씨의 이야기, 유년기를 광명에서 보내고 결혼 후 다시 광명에 자리를 잡은 임영혜 씨의 이야기이다.

4. 김행영 씨 이야기

전라북도 정읍이 고향인 김행영[1936년 생] 씨는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는 조흥화학공업(주)에 다니고 있었다. 김행영 씨는 영등포 지역 기업의 총무과장 회의 중에 개봉지구 택지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구로동 지역의 조흥화학, 독립산업, 대한유리, 구로소방서 등의 사람들 50명과 조합을 구성해서 1970년 광명5동 광명아파트 뒤쪽 너부대 초입의 산을 주택지로 구입하였다. 그 산은 너부대의 또다른 토박이였던 주씨네의 산이라고 들었다.

주택 설립은 개인 회사에게 맡겼는데, 다른 집보다 입주 준비를 늦게 하던 중, 이 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공사 마무리가 안 되어 고생했었다. 주택 설립의 조건은 주택이 들어서는 산을 깎아 광명아파트새마을시장 사이에 있던 연못을 메우고 상수도와 전기는 직접 개통하는 것이었다. 산은 묘지가 있던 곳이라 이장 공고를 했었다고 하는데도, 땅을 파면 관과 뼈가 나오기도 하였다. 조합 주택이 있던 자리는 당시 270-1호부터 270-50호 자리인데, 집 뒤로 6·25참전용사미망인회가 분양받아 지은 집들이 있었다. 조합 주택은 현재 대부분 빌라로 재건축되었고 당시 지어진 집은 몇 채 정도만이 남아 있다.

5. 장기상 씨 이야기

1965년부터 서면 지역의 우체부로 우편배달을 시작하여 광명우체국 시절에 정년퇴임을 한 장기상[1941년 생] 씨는 우편배달을 통해 광명의 변화상을 직접 체험한 산증인이다. 소하리 시절부터 우편배달을 했으니 광명 지역의 자연마을이 도시화되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셈이 되었다.

1960년대 말부터 광명사거리를 중심으로 한 구획 정리 지구에 주택이 들어서고 개발이 되자, 광명사거리 도로변 일대에는 가장 먼저 부동산과 술집이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광명4동에는 탁주주류판매소가 있던 관계로 자연스럽게 광명텍사스골목이 들어섰다.

대한주택공사에서는 광명1동 80번지 일대에 민영 주택을 지어 분양하였고, 철산구도로[현 도덕공원로]와 광명 쪽 오르막 사이에 한국일보사 사원 주택이 60동, 명성약국 앞과 광명초등학교 사이에 KBS 주택이 약 15동, 광명3동에서 청룡사 사이에 동아일보사 주택이 있었다. 구획 정리 지구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무허가 주택도 계속 늘어나서 새마을시장에서 너부대로 넘어가는 목감천 뚝방에는 판잣집을 짓고 딱지를 분양받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철산리와 광명리 경계 언덕에는 도덕산에서 내려오는 개울과 합쳐져 오리로[구 광덕로]를 따라 광명사거리를 지나 목감천으로 흘러들어가던 개천이 있었다. 이 개천은 택지 개발 당시 돌축대로 정비되었다가 1983년에 복개되어 사라졌다. 철산리의 양수장마을에서 지금의 광명6동까지 이어지는 수로도 있었으나, 구획 정리 때 모두 없어진 것 같다고 하였다.

이처럼 주택 시장이 활성화되고 각지에서 이주해 오는 외지인이 늘어나자 너도나도 주택 건설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들어서며 주택가는 광명사거리 일대를 벗어나 현재의 광명6동신기촌 지역과 광명7동 도덕산 아래 지역까지 확장되어 갔다. 이처럼 주택지가 무질서하게 들어서게 되고, 광명6동 목감천 주변이 오폐수로 인해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었다. 이 부지를 광명 지역의 기업인 광명개발의 최승권 씨가 매립하여 주거지를 조성하였다. 그리하여 이 지역을 일명 ‘최승권 단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광명의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갔고, 도시화는 지속되었지만 처음의 기대와 달리 광명의 서울 편입은 멀어져가기만 했다. 1980년에 들어서자 광명 지역민 일부가 광명의 서울 편입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었지만, 1981년 7월 광명출장소[광명리와 철산리]와 소하읍이 광명시로 승격되었다.

6. 임영혜 씨 이야기

임영혜[1969년 생] 씨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서 태어나 1971년도에 부모를 따라 광명시로 이사왔다. 부모님과 광명사거리의 2층 양옥주택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았는데, 어머니와 광명시장에 자주 다니던 기억이 생생하다. 광명시장은 그 당시에도 휩쓸려다닐 정도로 장보는 사람이 많았고, 시장의 순대집은 시장에 따라갈 때마다 사먹는 간식이었다. 광명국민학교[현재 광명초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는 2부제 수업을 하여서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등교 했다. 입학생이 너무 많아서 학교의 교실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어느 해인가는 광명남국민학교가 신설되면서 주소지에 따라 친구들이 강제로 학교를 옮기기도 하였다. 친하던 친구와 헤어질까봐 불안해하던 생각이 난다. 하지만 강제적 학군 조정이 아니더라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친구가 서울로 전학을 가는 일은 매달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학년이 올라 갈수록 떠나는 친구들은 잘사는 친구들이거나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라는 점을 느끼게 되어 서운함과 소외감을 동시에 느끼기도 하였다. ‘왜 나는 전학가지 않느냐’고 조르기도 할 정도였다. 이사뿐만 아니라 주소지를 이전하는 위장전학도 흔했다. 서울의 학교에서는 단속을 심하게 하여, 전학 갔다가 적발되어 다시 돌아온 아이도 있었다.

1977년 광명 지역에 일어났던 큰 물난리는 광명을 떠나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것 같다. 이후에도 안양천, 목감천이 넘쳐 수해를 입는 일이 종종 있었고, 광명사거리의 개천이 복개 한 후에도 역류하여 물바다가 된 일도 있었다. 지금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전학가는 친구들과 물난리의 기억이 가장 크다.

임영혜 씨도 6학년 때 서울로 전학하여 중고등학교를 계속 서울에서 다녔다. 친구들 중에서는 부천이나 광명, 군포 등에서 버스나 전철을 타고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많아서 원거리 통학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던 때였다. 덕분에 악명 높던 1호선 지옥철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 시절도 생활권이 서울이었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생활이 계속되어서 광명시의 변화에 대해 알지 못했다. 광명리가 광명시가 되고, 철산동이 변화한 것도 115번 버스를 타면 광명시에 간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알 정도였다. 그러나 광명동철산동보다는 노선버스를 타고 다리 한번 건너 영등포나 시청으로 나가는 것이 더 가까웠다. 따라서 광명에 살았어도 잠자는 곳만 광명시였고, 모든 삶의 중심은 서울에 있었다. 집은 광명시라고 말하면서도 광명사람이라는 인식은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결혼하고 다시 광명시에 정착하였다. 예전에 서울로 이사했던 친구들 중에서도 다시 광명시로 와서 새 가정을 꾸린 친구들이 많다. 어린 시절을 지낸 곳이라 익숙하기도 한 점이 있겠지만, 다른 지역보다 값이 싼 소형 아파트가 많아서 집을 장만하는데 유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광명시에 돌아와 사는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예전에 전학했던 경험 때문에 기존에 형성된 지역커뮤니티에 들어가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한다. 이해할 수 있는 점이다.

임영혜 씨가 바라는 점은 지역을 옮겨가며 계속되는 개발로 인해 그리고 여전히 고민거리인 교육문제로 인해 자신과 같이 고향 없이 떠도는 삶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광명시가 어디냐?고 물었을 때, 구로구 옆에 있는 곳 또는 금천구 옆에, 안양 가는 곳에 있는 동네가 아니라 광명시에 산다!라고 해도 어디쯤인지 알 수 있는 곳이 되고, 광명의 자랑인 복지기반이 더욱 탄탄해져서 살다보니 떠나기 싫은, 살기 좋은 도시가 되어주었으면 한다고 하였다.

[광명의 도시화와 그 의미]

1963년 서면 전체의 인구가 11,325명이었으나, 1980년 개청 전 광명출장소의 인구는 113,004명이었고, 소하읍의 인구는 32,841명이었다. 2010년 현재 광명시의 인구는 약 34만 명이다. 광명 지역 토박이들의 중에서 젊은이들은 1970년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그리고 그들의 고향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이면서 고향을 떠나갔다. 그것은 광명 지역을 고향으로 하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반대로 1970년대 젊은 부모를 따라 낯선 동네로 이사해 온 기억을 지닌 어린이들에게 광명이라는 곳은 그들의 태어난 고향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어린이들이 이제 장년이 되어 새로운 가정을 이루면서 광명에 뿌리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는 광명을 고향으로 하는 새로운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1970년대 광명동에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발생한 도농 격차와 정체성 혼란이라는 과도기적인 문제들은 1980년대 철산동, 1990년대 하안동, 2000년대 소하동과 2010년대 학온동 지역이 도시화되면서 교육이나 기반 시설, 복지 편중 등의 문제로 변이되며 반복되었고 또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달라지고 있는 점은 광명시를 고향으로 하는 아이들이 계속 태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광명이 고향인 새로운 아이들에게 광명은 더 이상 ‘왔다가 떠나는’ 동네가 아니라, 태어나서 배우고 자라난 추억이 있는 도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광명의 아이들을 위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들은 과연 무엇일까? 앞으로도 계속될, 아파트 숲으로 가득할 고향에 무엇을 남겨서 어린이들에게 보여줄 것인가? 팽창되는 수도권의 인구증가와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광명시가 4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그 몫을 담당하고 있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광명시가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국가적 사업을 거스를 수 없다면, 광명시에는 아파트 단지와 주택가 이외에 어떤 역사가 있고 어떤 사람들이 살아온 곳이었는지를 알릴 방법을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도시화 초기에 광명리가 겪었던 일들이 광명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선경험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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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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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2 본문 수정 블럭->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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