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3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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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好大 |
이칭/별칭 | 내문(乃門),중재(中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민욱 |
출생 시기/일시 | 1901년 12월 22일 - 이호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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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6년 - 이호대 부친의 『낭산문집』 간행 |
몰년 시기/일시 | 1981년 1월 29일 - 이호대 사망 |
묘소|단소 | 이호대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매산동 대좌등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저술 | 『중재집(中齋集)』 |
[정의]
현대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문인.
[가계]
이호대(李好大)의 본관은 전주. 자는 내문(乃門), 호는 중재(中齋)로, 1901년 12월 22일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애련리 천곡(泉谷)에서 태어나 1981년 1월 29일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이정보(李廷輔)이며, 증조는 이인하(李仁夏)이니 영천시 청통면 후평(後坪)에 처음 옮겨 살았고, 조부는 이창우(李昌禹)이다. 아버지는 낭산(朗山) 이후(李垕)이며, 어머니는 영양 이씨(永陽李氏)로 이두흠(李斗欽)의 딸이다.
부인은 경주 최씨(慶州崔氏)로 최석태(崔錫泰)의 딸이며, 슬하에 1남 1녀를 두니 아들은 이병도(李秉鍍), 사위는 달성(達城) 서상교(徐尙敎)이다.
[활동 사항]
이호대는 8세에 소학을 배워 일찍 문리(文理)가 났다. 1934년에 선대인의 상을 당해 지나친 슬픔으로 거의 혼절에 이르렀으니 모두가 효자라고 칭송했다. 1936년에 부친의 『낭산(朗山) 문집』 11책 28권을 간행하였고,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과 중재(重齋) 김황(金榥)과 도의로 교류하며 편지로 학문을 논하였다.
1962년과 1964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여러 번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을 하지 않다가, 1966년 개헌 당시 학생들이 궐기하여 민심이 흉흉하자 또 편지를 보내었기에 답하기를 “대공(大功)을 세우려는 사람은 반드시 큰 지략이 있어야 하고, 실업(實業)을 세우려는 사람은 반드시 진실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권세를 빙자하여 공을 세우려 하고 어진 척하면서 사업을 하려는 자는 혹 한때 등용이 되더라도 마침내 하늘과 백성에게 도움을 얻지 못합니다. 각하는 군인으로 분연히 일어나 대권을 잡으시어 처음에는 정치도 맑고 법도 밝았으며, 관리도 청렴하고 백성도 자정하더니 세월이 점점 흘러감에 맑던 것이 탁해지고, 밝던 것이 흐려지니 어찌 각하의 마음 씀이 전후가 다르십니까? 이것이 바로 근본이 서지 않고는 끝이 다스려지지 않는 이치입니다. 오직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천명과 인심을 기다릴 따름입니다”고 하였다.
이호대는 원근에서 배우러 오는 많은 이들을 각각 그 재주에 따라 가르치되 등급을 건너 뛰어 올라가지 못하게 하고, 경계하는 글을 손수 써서 서당 벽 위에 붙여 놓고 문생들로 하여금 분발심을 환기시켰다.
[학문과 저술]
석판본인 21권 2책의 『중재집(中齋集)』이 있다.
[묘소]
이호대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매산동 대좌등(大座嶝)에 축좌(丑坐) 향으로 있으며, 진성(眞城) 이수락(李壽洛)의 갈문(碣文)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