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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955
한자 李甲基
영어공식명칭 Lee Gapgi
이칭/별칭 이형림(李荊林),현인(玄人)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봉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8년연표보기 - 이갑기 출생
출생지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물동
거주|이주지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성격 문학가
성별
대표 경력 『만선 일보』 기자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시인·문학 평론가·소설가.

[활동 사항]

이갑기(李甲基)[1908~?]는 1908년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범물동 501번지[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물동]에서 태어났다. 필명은 이형림(李荊林)현인(玄人)이었다. 1930년대 초부터 문학 평론가로 활동하였으며, 만주에서 염상섭·안수길·박팔양 등과 더불어 『만선 일보(滿鮮日報)』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문학 평론가 활동은 1920년대 말 카프[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 가입하면서 시작되었다. 1930년대 초반부터 카프의 맹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주의 문학파 및 해외 문학파와 계급 문학 운동을 둘러싼 논쟁에 참여하였다. 이갑기는 1933년 카프의 조직 해산론을 제기하였다. 카프의 극단적인 종파 주의가 문예 활동을 억압하여 카프의 정신 자체를 무너뜨릴 위기에 있으므로 조직의 재정비를 위해서라도 카프는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갑기는 1934년 카프 2차 검거 사건이었던 이른바 신건설사(新建設社) 비밀 조직 사건에 연루되어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전주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35년 5월 카프가 해산된 이후에는 거의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 8·15 광복 직후,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담한 후에 부인 최정원과 함께 월북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갑기는 비교적 일찍 월북하였으며, 1970년대 초엽까지 평론과 함께 시·소설·수필 등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예술의 성립과 그 해체」[1930], 「소설 삽화와 삽화 제가」[1930], 「프로 문예 운동 작금의 회고와 전망」[1932], 「문단 촌침」[1932], 「채만식 군에게-약간의 준비적 질문에 답함」[1932], 「이효석의 사변을 주함」[1932], 「문예 시평」[1932], 「문단 SOS-'혼란 저조의 문단'을 읽고서」[1932], 「문단의 위험 신호?-'혼란 저조의 문단'을 희함」[1932], 「예술 운동의 전망-푸로 연맹을 중심하여」[1932], 「문예 시평」[1932], 「문단의 퇴폐와 문예 운동의 신단계」[1933], 「민족의식의 역사성과 민족주의 문학」[1933], 「동반 작가 문제」[1932], 「문단의 퇴폐와 문예 운동의 신전개」[1933], 「양주동 씨의 계급적 이반」[1933], 「해외 문학파와 그의 기본적 동향」[1933], 「예술 동맹의 해소를 제의함」[1934], 「작가와 비평가와 문단」[1934], 「창작의 방법론에 항하여-예술적 진실과 방법의 비논리성」[1936], 「문인과 생활 문제」[1936], 「문예 비평에 대한 견해의 상대성」[1936], 「창작의 방법론에 항하야」[1936], 「문예 시평」[1936] 등이 있다.

월북 이후에는 단편 소설 「료원」[1949], 「보도자」[1949], 「한 깃발 아래서」[1950], 시 「두 세계」[1950], 단편 「강」[1952], 「봉녀」[1954] 등을 비롯하여, 평론 「남반부 문학의 현상」[1957], 단편 「기적」[1959], 평론 「천리마의 집단적 주인공」[1960], 단편 「쾌동이」[1963], 평론 「세부의 묘사에 대한 소견」[1964], 시 「락동강! 나의 강아」[1964], 평론 「계절과 인품」[1966], 단편 「고지에로의 길」[1967], 「메아리」[1967], 「섬멸」[1968], 「생활의 길」[1969] 및 단편 「집」[1970] 등의 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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