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494 |
---|---|
한자 | 權重樂 |
영어공식명칭 | Kwon Joongra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908년 - 권중락 출생 |
---|---|
수학 시기/일시 | 1925년 - 권중락 대구상업학교 3년 중퇴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8월 20일 - 권중락 이원식·이복영·이삼근 등과 함께 경북유족회 사무실에서 합동묘패건립위원회 구성 |
활동 시기/일시 | 1961년 3월 14일 - 권중락 이대악법반대경북정당사회단체공동투쟁위원회 결성대회에 경북유족회 대표로 참가 |
출생지 | 선양리 -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선양리 |
거주|이주지 | 대명동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
성격 | 사회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경북피학살자유족회 총무 |
[정의]
대구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
[개설]
권중락(權重樂)[1908~?]은 4·19혁명 이후 대구에서 경북피학살자유족회 활동과 이대악법반대운동을 펼친 사회운동가이다.
[활동 사항]
권중락은 1908년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선양리에서 태어났다. 1923년 대구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때 중퇴하였고, 서울 등지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광복 후 봉화에서 인민위원회 치안대장을 지내다 1947년 2월 경북경찰국에서 군정포고령 위반으로 약 7개월간 구속되기도 하였다.
권중락은 1960년 6월 말 형 권중엽(權中燁)이 군경에게 학살당한 것을 계기로 경북지구피학살자유족회에 가입하여 총무를 맡았다. 경북지구피학살자유족회는 1960년 6월 9일 경북피학살자유족회 준비위원회의 발족을 거쳐 6월 15일 대구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결성되었다. 권중락은 1960년 8월 20일 이원식·이복영·이삼근 등과 함께 경북유족회 사무실에서 ‘합동묘패건립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원식의 제안으로 작성된 취지문을 채택하였다. 취지문의 내용은 “민족의 원수 밑에서 조국과 민족의 자주 독립을 염원하다가 무참히 희생된 동포들을 위하여 묘패를 건립한다”라는 것이었다. 권중락은 9월부터 대구 수창동, 지묘동, 송현동, 본리동, 만촌동 등지를 답사하며 인명 조사 및 사인 불상의 유골을 발굴하였고, 합동 묘패를 건립하였다. 권중락은 묘패 건립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묘패 건립 취지서를 신문에 광고하였고, 이를 들고 정부 각 기관과 지역의 유지 등을 찾아다니며 건립 기금을 모금하였다.
권중락은 1960년 10월 말 경주지구유족회가 군경유가족회와 충돌하자 이원식·이복영·김현구·이효철 등과 함께 경북유족회원 60명을 버스로 인솔하여 경주 군경유가족회 회원들과 함께 경찰서를 방문하여 항의하고 돌아왔다. 권중락은 이원식과 함께 “이 독재의 앞잡이 살인마들을 처단하려는 유족회의 활동을 방해하는 자 누구냐”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작성하여 언론기관과 각 혁신정당 및 사회단체에 배포하였다.
권중락은 이복영·김현구 등과 함께 1961년 3월 14일 사회당 경북도당 사무실에서 열린 이대악법반대경북정당사회단체공동투쟁위원회 결성대회에 경북유족회 대표로 참가하고 지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3월 21일 대구역 광장에서 이대악법반대경북정당사회단체공동투쟁위원회 주최로 열린 이대악법반대시민궐기대회에 “상기하라 대학살, 철회하라 이대악법”이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참가하여 대구역 광장에서 덕산동까지 행진하였다.
권중락은 1961년 3월 26일 대구 송현동에서 유족과 일반 시민 1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사회를 맡아 시굴식(始掘式)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5·16군사쿠데타 이후 구성된 국가재건회의에 의해 국회와 지방의회, 15개 정당, 238개의 사회단체가 해산될 때 강제 해산되었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특수반국가행위사건'으로 분류되었고, 권중락은 혁명재판소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