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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88
한자 慶北共産黨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0년 1월연표보기 - 경북공산당 사건 연루자 검거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30년 12월 27일연표보기 - 경북공산당 사건 대구지방법원 결심공판
성격 사회운동
관련 인물/단체 조선공산당경북도기관

[정의]

1930년에 조선공산당경북도기관이 일제 경찰에 탄압을 받은 사건.

[역사적 배경]

1927년 8월에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에 좌익운동의 지도 기관인 제3차 조선공산당의 경북도기관이 조직되었다. 조선공산당경북도기관은 1927년 11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제4차 조선공산당경북도기관대회[도 간부회]를 열고 조선공산당 경북 책임비서에 장적우(張赤宇), 고려공산청년회 경북 책임비서에 이목(李穆)을 선출하였다. 이어 1928년 상반기까지 대구를 비롯하여 김천, 상주, 문경, 포항, 영천, 안동 등지에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의 야체이카(Yacheika)[세포를 의미하는 러시아어]를 설치하여 대중운동과 민족운동을 지도하였다.

[경과]

조선공산당경북도기관은 1930년 1월부터 3월까지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영향을 받아 구성원들이 일제 관헌에 검거되면서 와해되었다. 조선공산당경북도기관 구성원들의 검거 사건은 ‘상주공산당 사건’, ‘안동·풍산소작인회 검거 사건’ 등으로 각각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 뒤 두 사건을 비롯한 관련 사건들이 경상북도 경찰부에서 ‘경북공산당사건’으로 정리되었다. 조선공산당경북도기관의 지방 조직 가운데 상주, 문경, 안동 등의 야체이카에 대한 사건이었고, 구성원의 거주지로 보아서는 상주, 예천, 영주, 안동, 김천, 문경, 봉화 등을 포함한 여덟 곳에 걸쳐 벌어진 사건이었다.

「치안유지법」에 따라 경북공산당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인원은 모두 16명이었다. 경북공산당사건으로 검거된 사람들은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계에서 5개월~8개월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결과]

경북공산당사건으로 검거된 사람들 중 6명은 1930년 11월 중순 대구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예심 종결과 동시에 면소(免訴) 처분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10명은 대구지방법원의 정식재판에 넘겨졌다. 면소 처분으로 석방된 사람은 예천의 박호철[일명 박창호], 영주의 김봉호[일명 김동필], 안동의 이창직과 이상렬[일명 이광춘], 봉화의 황윤경 등이었다.

경북공산당사건에 대한 결심공판은 1930년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 제4호 법정에서 열렸다. 결심공판에 넘겨진 사람은 예심 판결 때보다 6명 많은 16명이었으며, 8명은 징역형, 8명은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판결 내용은 이회승(李會昇) 징역 2년, 이병호(李塀鎬) 징역 1년 6년, 최경한(崔慶漢) 징역 1년 3월, 유연술(柳淵述) 징역 10월, 최상돈(崔相敦)·신봉일(申奉日)·이견구(李見求)·김기진(金箕鎭) 각 징역 8월이었다. 그리고 남장(南璋)·남병세(南炳世)·안상태(安相泰)는 각 징역 10월 집행유예 4년, 김연한(金璉漢)·강용수(姜龍洙)·신영철(申泳澈)은 각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 오성무(吳成武)·이운호(李雲鎬)는 각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이었다. 모두 항소하지 않고 옥고를 겪었다.

[의의와 평가]

경북공산당사건은 1920년대 대구·경북 지역에 사회주의 운동이 축적된 위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경상북도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의 기반이 해체됨과 동시에 대구·경북 지역의 사회운동이 193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혁명적 대중운동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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