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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565
한자 尹宜炳
영어음역 Yun Uibye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동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옛 시흥군 서면 소하리]
성별
생년 1900년연표보기
몰년 1960년연표보기

[정의]

일제강점기 광명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윤의병(尹宜炳)[1900~1960]은 시흥군 서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때 최호천(崔浩天)과 함께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서울에서 만세 시위가 격렬하여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에 돌아와 청년들과 독립 운동을 계획하여 이끌었다. 그리하여 소하리와 가리대리의 주민 200여 명을 지휘하며 1919년 3월 28일 밤 이정석(李貞石) 구출 사건을 주도하였다.

윤의병최호천과 함께 소하리 주민 100여 명을 규합하여 노온사리(老溫寺里) 주재소를 향하던 중 가리대리 주민 100명이 가세하자, 모두 200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였다. 시위 군중은 곤봉과 돌로 무장한 채 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이정석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이때 시위 군중은 주재소의 게시판을 넘어뜨리는 등 물리력을 행사하였다. 그러자 순사와 순사보들은 불을 끄고 아무도 없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이에 윤의병은 군중을 두 갈래로 나누어, 한 갈래는 자신이 인솔하고 다른 군중은 최호천이 인솔하여 각각 이정석을 체포하였던 조선인 순사보 김정환(金定煥)과 최우창(崔禹昌)을 잡으러 다녔다. 결국 잡지 못하고 다시 주재소에 모여서 독립 만세와 이정석의 석방을 요구하자, 주재소 안에 숨어 있던 일본인 순사 아카마쓰(赤松)가 불을 켜고 나와 이정석의 석방을 약속하였다. 이에 윤의병은 시위 군중을 보통학교 뒤쪽으로 인솔하여 만세를 외치게 하고 해산시키는 등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계속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였으나, 1920년 6월 1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요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고, 광복 후 귀국하여 독립 국가의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슬하에 윤형중(尹炯重), 윤세중(尹世重), 윤홍중(尹弘重) 세 아들과 딸 윤귀중(尹貴重)을 두었다. 묘소는 대전국립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3년 정부에서는 윤의병의 공훈을 기려 대통령 표창을 하였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02.10 [상훈과 추모] 수정 <변경 전> 슬하에 윤세중(尹世重)과 윤홍중(尹弘重) 두 아들을 두었다. 묘소는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변경 후> 슬하에 윤형중(尹炯重), 윤세중(尹世重), 윤홍중(尹弘重) 세 아들과 딸 윤귀중(尹貴重)을 두었다. 묘소는 대전국립현충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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