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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478
한자 全州李氏益寧君派敎旨
영어의미역 King's Document of Ingyeonggun's Blood Relatives of Jeonju Yi Cla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동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문서|교지
관련인물 이존도|이인복|이언수이언충|이겸환|이정환|이시좌
용도 관공문
발급자 숙종|영조
수급자 이존도|이인복|이언수|이언충이겸환|이정환|이시좌
발급일시 1696~1759년연표보기연표보기
발급처 충훈부|이조
소장처 충현박물관
소장처 주소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1085-2[오리로347번길 5-7]지도보기

[정의]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충현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 전주이씨 익녕군파 후손이 받은 교지.

[개설]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의 셋째 부인인 군부인(郡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의 묘소가 광명시 소하동[옛 소하리 마산(馬山) 삼석봉(三石峯) 아래]에 들어서면서 이곳은 군부인 조씨 소생 후손의 선산이 되었다. 이후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이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며 관감당(觀感堂)을 하사받았고, 사후에는 오리영우(梧里影宇)가 건립되어 마을 이름이 영당말로 되는 등 소하동 일대는 전주이씨이원익과 밀접한 지역이 되었다.

이에 그의 종손(宗孫)의 종가(宗家)가 소하동 지역을 토대로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광명의 지역사적인 맥락에서 이원익의 직계 후손인 이존도(李存道)[1659~1745], 이인복(李仁復)[1683~1730], 이언수(李彦秀)[1713~1774], 이언충(李彦忠)[1716~1776], 이겸환(李謙煥)[1739~1791], 이정환(李鼎煥)[1736~1786], 이시좌(李時佐)[1776~1842] 등의 교지가 전승되었다고 하겠다.

[구성/내용]

전주이씨 익녕군파 교지(全州李氏 益寧君派 敎旨)를 인물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완성군(完成君) 이존도와 관련된 것으로 모두 22건이다. 이중 차첩(差帖)이 2건인데, 하나는 충훈부(忠勳府)에서 이존도를 호성공신(扈聖功臣) 이원익의 적장손(嫡長孫)으로 차정(差定)한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이조에서 종4품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차정한다는 내용이다.

이존도에게 내린 교지는 10건으로 충좌위(忠佐衛)의 부사용(副司勇), 부사과(副司果), 부호군(副護軍), 부사직(副司直), 평창군수, 동지중추부사 및 아내인 안동권씨를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한다는 내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창군수를 제외하면 실직이 아닌 점과 대부분 군(君)을 승습(承襲)하여 자급(資級)을 받은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나머지는 녹패(祿牌) 2건과 그에 따른 녹표(錄標) 8건이다.

두 번째는 완양군(完陽君) 이인복과 관련된 것으로 모두 5건이다. 1705년(숙종 31)의 생원시 합격 교지인 백패(白牌), 1714년(숙종 40) 문과 급제 교지인 홍패(紅牌), 좌승지와 용양위부사직, 병조참판 등에 임명한다는 교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인복은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과 깊은 교유를 갖는 등 18세기 후반 남인(南人)의 촉망받은 인물이었다.

세 번째는 이언충과 관련된 것으로 모두 6건이다. 1750년(영조 26)의 진사시 백패, 만녕전참봉, 조봉대부, 조산대부(朝散大夫),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임명하는 교지와 의금부도사에 차정한다는 교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네 번째는 이언수의 처 강씨를 정부인으로 추증한다는 교지인데, 아들 이점환(李漸煥)의 추영(追榮)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다섯 번째로, 이겸환과 관련된 2건으로 통덕랑(通德郞)과 용양위부사직에 임명한다는 교지이다. 통덕랑에 임명하는 교지는 삼촌인 충훈부도사 이언수가 자궁(資窮)이 되면서 대가(代加)된 것이다. 여섯 번째는 이정환과 관련한 교지 1건으로, 아버지 충훈부도사 이언수가 자궁이 되면서 대가 받은 것이다. 일곱째는 이시좌와 관련한 교지 3건으로 온능참봉, 내섬시봉사(內贍寺奉事), 용양위부사과에 임명한다는 교첩 및 교지이다.

[의의와 평가]

전주이씨 익녕군파 교지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했던 공으로 호성공신이 된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의 후손들의 군(君)의 승습(承襲) 계승과 관력(官歷)의 추이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특히 조선 후기 공신 후손이면서 실세한 남인 집안의 관직 진출의 양상을 보여 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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