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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031
한자 改新敎
영어공식명칭 Protestantism
이칭/별칭 신교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덕묵

[정의]

경기도 광명시에서 활동하는 기독교의 분파.

[언더우드와의 인연으로 시작된 광명 지역 개신교]

광명 지역의 개신교 역사는 1903년(고종 40) 5월 창립한 광명교회와 1905년 문을 연 하안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명교회의 첫 신자는 충청도, 황해도, 서울 말죽거리 등에서 이주하여 광명리에 거주한 이주민들로, 처음에는 각각의 가정을 순회하며 예배를 하다 1912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하안교회 김기현 전도사 등의 도움을 받아 초가 6칸[12평 정도]의 교회를 세웠다. 하안교회는 1905년 언더우드가 당시 광명시 하안동 밤일마을에 살던 박순선의 가정에서 예배를 보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언더우드 목사가 파견한 전도인 이낙선, 이용석 등이 전도한 김연순, 곽덕원, 서은경, 김성환, 박순석 등이 하안교회를 설립하였다. 이것으로 볼 때 초창기 광명 지역 기독교는 미국 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와의 인연이 깊다고 볼 수 있다.

언더우드는 1859년(철종 10)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13세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대학과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학교에서 문학과 신학을 연수하고 1884년(고종 21) 7월 28일 북미 장로회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85년 1월 일본에 도착하여 2개월간 체류하는 동안 한국인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를 학습하고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그해 4월 5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이후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학생들에게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고 알렌을 도우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선교를 시작하여 각지에서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당시 농촌 촌락이었던 광명 지역도 언더우드의 발자취가 이르렀던 곳이다.

[광명 지역 초기 교회]

광명교회 신자로는 처음 언더우드 선교사의 통역자로 활동한 한경애와 한경애의 딸 조은상이 있었다. 또 송준호, 홍문필, 홍수범, 김흥서 등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홍수범이 조은상과 결혼하고, 이후 가리봉교회의 박창덕 장로가 이들의 사위가 되었다. 시흥교회의 황복순 집사 가정은 조은상이 황해도에서 데리고 온 딸이었다. 또한 하안교회 박영천 장로의 딸과 조은상 집사의 아들 홍영업이 결혼함으로써 광명교회, 가리봉교회, 시흥교회, 하안교회는 완전한 인척 관계로 매어져 이 지역 전도에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한신애 선교사는 왕골 부인과 함께 인근 지역을 전도하는 데에 힘써 하안교회, 시흥교회, 가리봉교회, 옥길리교회, 계수리교회 등을 개척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일제 강점기 광명 지역 교회]

광명 지역 개신교 신자들은 일본의 탄압과 박해에도 선교와 교육 사역을 계속하였다. 광복 이후 광명교회는 새로 부흥하기 시작하였으며, 1950년대에는 당회장 김기현 목사를 청빙하여 새로운 교회를 건축하는 등 교회 발전의 기틀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4년 교단 분규가 노골화된 가운데 조선신학교[기장] 측 입장을 취한 광명교회는 교회 내분을 수습하고 윤석주 전도사를 맞이하여 교회를 안정시킨 후 점차 부흥하게 되었다. 이후 광명교회는 1,000여 명의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광명 지역의 대표적 교회로 자리 잡았다.

하안교회는 교회 설립 후 조사(助師) 홍성서, 김기현, 이춘경 등이 계속 시무를 하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하던 하안교회는 당시 일제의 압박에도 찬송과 성경을 통해 우리말을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심어 주었다.

[6.25전쟁기~2010년대 광명 지역 교회]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한국 교회 대부분이 위기를 맞았으나 하안교회는 피해를 입지 않아 당시 부통령이던 함태영 박사도 방문할 정도로 영향력이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1960년대 들어 교인이 300여 명에 이르러 당시 한국 교회에서 손꼽힐 정도로 성장하던 하안교회는, 1960년대 말 정부의 그린벨트 정책으로 밤일마을의 개발이 제한되면서 교회의 성장 역시 멈추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광명시에 흩어져 살고 있던 교인들이 지역 사회의 발전에 따라 6개 처에 달하는 교회의 설립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2005년 하안교회는 100주년 기념 예배를 드렸다.

광은교회는 1974년 목사 김한배가 건립한 교회이다. 김한배는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 광명 지역 전도 사업에 뜻을 두고 현재까지 가장 활발한 전도 활동을 전개하여 광은교회를 광명 지역 최대 교회로 키워 냈다. 김한배는 광명교회연합회 회장과 서울노회장총회신학교 부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광은교회는 전도 사업 외에도 유치원 운영과 소년소녀 가장 돕기 장학금 지급, 불우 이웃 돕기 및 농어촌 미자립 교회를 지원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2010년 12월 기준 신도 수가 5,000여 명에 이르며, 광명동의 광명성전을 비롯하여 하안동 하안성전과 시흥시 정왕동 시화성전, 고양시 일산구 마두동 일산성전 등 4개의 교회가 있다.

광명중앙교회는 1978년 5월 21일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 상가 2층 66㎡를 임대하여 전도사 우병설이 시작한 교회이다. 1988년 9월 철산동 지금의 건물 248㎡를 매입하여 이사하였으며, 2003년 11월 2일 성전을 827㎡로 확장하였다. 2008년 5월 25일에는 30주년을 맞이하여 창립 30주년 기념 예배와 홈 커밍데이 행사를 거행하였다.

광명중앙침례교회는 1983년 건립한 교회이다. 이 지역은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밀집한 지역으로 이곳의 가난한 심령들을 위하여 헌신하려는 마음으로 목사 이한진이 교회를 개척하였다.

[현황]

광명시에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광명교회하안교회가 있다. 100년 전의 광명 지역은 자연 촌락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신도의 수는 많지 않았다. 더욱이 하안교회가 자리한 하안동 밤일리의 경우 1960년대에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이면서 유입 인구가 줄어들어 교회가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소하동, 광명동, 철산동 등지는 인구가 급증하여 교회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광명 지역은 시로 승격된 이후 아파트 건설붐이 일면서 외부에서 유입되는 인구가 많아졌고, 개척 교회들이 생겨났다. 『광명시지』[2006]에 따르면 1981년 광명시청 개청 당시에는 66개 교회, 1만 2478명의 신자가 있었으나 1991년에는 소하2동에만 19개의 교회가 있었으며 2001년에는 35개로 늘어났다. 광명7동도 택지 개발로 인하여 기존 9개의 교회가 25개로 늘어났다. 택지 개발과 인구 유입이 교회 증대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2021년 8월 현재 광명시에는 340여 개의 교회가 있다. 교회가 늘어나면서 공동의 활동을 위한 ‘광명시교회연합회’, ‘기독교교회협의회’라는 단체도 생겨났다. 광명시교회연합회는 1979년 광명기독교연합회로 출발하여 1992년 광명시교회연합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창립 목적은 교회 간 협력과 지역 복음화 및 민족 복음화에 있으며 부활절 연합 예배, 6.25구국기도회, 불우이웃돕기, 목회자 세미나를 하고 있다. 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91년 창립하였다. 당시 광명교회, 화평교회, 구름산교회, 한울림교회, 성공회 광명교회 등의 목사들이 모여 신앙 운동과 선교를 위한 교회들 간의 유대와 연합 운동 및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과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한 공동 증언의 사업을 전개하고자 설립하였다. 기독교교회협의회는 그동안 평화통일 주일연합예배, 판문점 역사기행, 공명선거운동, 실업극복운동, 사랑의 밥집, 평화운동과 평화교육, 평양 방문, 국내외 재난 헌금과 봉사를 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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