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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이 세운 광명광덕초등학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C030101
지역 경기도 광명시 철산3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철원

[주민들의 자랑 광명광덕초등학교]

우리 민족은 가는 곳마다 먼저 학교를 세우고 높은 교육열로 자녀들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철산동광명광덕초등학교 설립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높은 교육열을 그대로 보여 준 철산리 주민들의 실제 경험담이다.

1959년 주민들이 직접 세운 광명광덕초등학교는 주민들의 자랑이었고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지역 내 중요한 공공 기관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 광명광덕초등학교에서 열리는 봄철 운동회는 온 동네 주민들이 구경하는 동네 축제였으며 구름산 자락이나 도덕산 가재울[하안5단지 인근]로 가던 학교 소풍은 어머니들의 나들이도 겸하였던 주민 오락의 동락의 공간이었다.

광명광덕초등학교[당시 이름은 서면초등학교 철산분교] 건물은 1959년 10월 31일에 세워졌는데, 당시 교실 1개[82.64㎡]와 사무실[13.22㎡], 숙직실[19.83㎡]이 신축되었다. 이듬해인 1960년 3월 5일에 서면초등학교 철산분교로 1학급이 시작되면서 학교가 개교하였다. 서면초등학교 철산분교는 시흥군 서면 철산리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학교였다.

[학교를 세우기 위한 지역 유지들의 노력]

철산리서면초등학교 철산분교가 세워지게 된 것은 철산리에서 서면초등학교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당시 초등학교 진학을 앞둔 큰 딸을 두고 있었던 정운교[1931년생] 씨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이곳에 살던 아이들은 가까운 분교에서 1년을 다닌 후 모두 멀리 서면초등학교까지 걸어서 다녀야 했어요. 학교가 멀다 보니 당연히 부모들의 관심도 떨어지고 중도 탈락도 많았어요. 동네에 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주민들의 뜻이 모아져 하안리부터 여러 곳을 물색하던 중 지금의 자리에 학교를 세우게 되었지요.”

서면초등학교 철산분교 부지는 토박이인 덕수장씨 문중의 장세일 씨 소유였다. 이에 정운교 씨를 포함한 이장 3명이 장세일 씨를 찾아가 땅을 제공해 줄 수 있는지를 물으며 정중히 부탁했다. 그리하여 여러 시간의 논의와 설득 끝에 부지를 제공받았다고 한다.

이때 시흥군청에 다니던 유지현 씨를 만나 설계와 건축을 맡겼다. 학교 건축 자재를 이동할 길이 없어 지금 구도로라고 불리는 길을 넓혔다.

건설 당시에는 큰 길이었던 구도로 방향으로 학교 정문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후문이 그때는 정문이었다. 구도로를 넓히는데도 장세일 씨 소유의 땅이 상당히 들어갔다고 한다. 이처럼 장세일 씨 등 이미 작고한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학교 부지를 희사하고 주민들이 모금 운동을 벌이는 등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 속에 학교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64년 3월 6일에는 광덕국민학교로 승격하였다. 독립된 초등학교로서의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초대 교장으로 이원식 교장선생님이 부임했고, 학년당 1학급이 있었다.

[졸업생들의 기억 속에 자리한 옛 초등학교의 모습들]

1966년의 학사 보고에 의하면, 총 학생 수는 263명으로 4학년이 52명으로 제일 많았고 3학년이 38명으로 가장 적은 학급 인원이었다. 1966년 42명의 졸업생들이 처음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는데, 남학생 22명 중 16명이 진학한 것에 비해 여학생은 20명 중 4명만이 중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시흥군 서면 지역에는 소하리서면국민학교와 가학리의 안서국민학교 2곳밖에 학교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덕국민학교의 개교는 적게는 10리에서 15리에 이르기까지, 통학이 크게 불편했던 철산리모세[연서], 뱀수[사성]마을 학생들의 통학을 크게 개선시켜 주었고 교육열을 일구는 데 기여하였다.

광명광덕초등학교 1회 졸업생인 장순철 씨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학년에는 한 학급이 있었다. 대략 한 반에 44명 정도 됐는데, 정이 깊어서인지 지금도 1회 졸업생들은 1년에 한 번 정도 모이고 경조사는 서로 잊지 않고 챙긴다고 한다. 그 중 서명석, 장환진, 백의자, 이대용, 안순옥 등은 꾸준히 모이는 개근 멤버라고 한다.

학교 주변도 발전하였다. 학교 뒤편 철산4동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학교 주변 변두리에 자연스럽게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시장도 생겨났다. 그렇게 학교 옆에 철산시장이 생긴 시기가 1970년대이다. 학교 가는 길은 이 시장 길을 따라 나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문방구, 떡볶이가게, 이발소가 있던 거리를 뛰어다니던 기억은 지금도 아련하게 졸업생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1977년에 졸업한 13회 졸업생 나대원[1964년생] 씨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6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돼서 학교 운동장의 화단을 가꾸고, 배수구를 청소하고, 운동장의 돌을 골라냈어요. 학교 건물 수리도 학생들이 동원됐는데, 그때의 아이들은 지금 아이들보다 어른스러워서 힘들어도 노력 봉사에 군말 없이 따랐고 나름의 일꾼 몫을 해 냈어요.”

한편, 도시화가 시작되면서 1980년부터는 인근 철산주공 저층 단지의 입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인근에 철산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일부 학급이 분리되었다. 학교의 분리 개교는 계속 이어져 광명 지역의 학생과 철산동 모세 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광명동초등학교가 1983년 개교하였다. 이후에도 1986년 광명북초등학교, 1989년 하안북초등학교 등이 연이어 개교하였다.

처음에는 광명광덕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1986년 광명북초등학교가 개교되면서 전학을 가야만 했던 김광현[1974년생] 씨는 당시의 기억을 이렇게 말한다.

“익숙했던 환경이 달라지면서 갑자기 찾아온 변화가 생소했고 전학 간 학교의 낯선 공간을 찾아다니면서 마치 포로가 된 것처럼 어린 나를 괜히 주눅 들게 했습니다.” 어린 시절 전학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설렘과 두려움의 이중적인 기억을 갖고 있는 듯하다.

1984년에 졸업한 20회 졸업생 이동춘[1971년생] 씨는, 당시 인근의 서울시 근로복지관 강당에서 졸업식을 했다면서, 학교에 모였다가 줄을 서서 이동한 후 치렀던 졸업식은 학교에 대한 마지막 추억조차도 가물거리게 했다고 전한다. 지역에서 사업을 하면서 광명중학교 동문회 사무국장을 맡아 보고 있는 이동춘 씨의 기억에는, 당시 남자 동기들은 광명중학교로 진학을 많이 했다고 한다. 현재 자신이 파악하기로는 500명 졸업생 중에 약 30%인 150명 정도가 아직 광명시내에 거주한다고 전한다. 아마도 광명시가 서울 인근의 도시이며 교통이 편리하여 서울로 취업을 하거나 진학을 해도 정착해서 살아가는 동문들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고 전한다.

광명광덕초등학교는 교육에 대한 주민들의 욕구와 노력의 결실로 만들어진 곳이다. 학교 주변으로는 시장과 같은 지방 소읍의 변두리 풍경이 어우러져 있었다. 학교 주변은 학생뿐만 아니라 학부모의 발길도 많이 오갔다는 것이다. 시 개청 후에는 변화된 환경에 따라 철산초등학교, 하안북초등학교, 광명동초등학교, 광명북초등학교 등으로 학생들이 계속 분산되었다. 도시화로 인한 인구 유입과 공공 교육의 확대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현상이다.

2010년 3월 현재 광명광덕초등학교는 41개 학급 1401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특히 광명광덕초등학교는 축구부의 활동이 뛰어나서 전국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한 축구 명문이다. 2008년에는 학교운동장에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지원으로 인조 잔디가 깔리면서 언제든지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철산동은 많은 변화를 겪었고 예전의 모습도 많이 잃었다. 하지만 40년이 넘게 한 자리를 지켜온 광명광덕초등학교가 있어 지역의 토박이들은 옛 학창 시절을 추억할 수 있고 시민들은 현대 역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정보제공]

  • •  정운교(남, 1931년생, 철산리 전 이장)
  • •  나대원(남, 1964년생, 광명광덕초등학교 제13회 졸업생)
  • •  이동춘(남, 1971년생, 철산초등학교 제20회 졸업생)
  • •  김광현(남, 1974년생, 철산동 거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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